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gsin Jan 01. 2023

날 살아있게 하는 두 가지에 관해서.

그냥 내가 좋아했던 것들 3





“그래서 살 수 있겠다.”







하나.


할머니. 치마폭의 포근함. 모태. 모성. 엄마. 사랑.




모든 인류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사람에 관한 한 나에게는 지독한 편애가 있다. 나의 편애와 선호의 경향을 자세히 풀어놓으면 아마 칠백 가지도 넘을 것이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좋아, 위트가 있는 사람이 좋아, 볼이 조금 까무잡잡한 사람이 좋아와 같이.



하지만 나는 사람을 유형화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 필요에 의해 이뤄지는, 편의상 차원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10인 10색이란 말처럼, 사람은 열 명이 있으면 열 명의 모습이 다 다르다. 각각 너무나 다른 개성과 개성이 만나서 형성하는 관계의 오라aura는 더군다나 더욱 예측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자신은 어떤 유형의 사람을 좋아한다고 밝혀도 그 말이 당장 썩 의미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대신 ‘나는 누굴 좋아해, 누구를 잊지 못해.’와 같은 문장 속의 목적어가 되는 고유명사가 의미 있다고 믿는다. 그토록 구체적인 한 명의 인격에 대한 기억만이, 그러한 시간만이 우주의 별처럼 유일하게 빛날 뿐이다.



MBTI나 혈액형 분류법이 우리의 순수한 눈과 마음을 많이 망쳐놓았다.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는 분류법이 사람을 다 표현할 수 없듯이 취향도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솔로에서, '키가 큰 사람은 별로예요.'라고 말하던 여자 출연자가 결국 매달리게 된 남자는 190이 넘는 남자였다. 장거리 연애를 감당할 수 있겠냐느니, 여가시간에 함께 할 취미가 달라서 우리는 힘들겠다느니. 이처럼 얄팍한 연애 풍조는 대체 다 어디에서 왔으며 이것들은 죄다 무슨 궤변일까. 그런 것은 어느 순간이 되면 일제히 모두 사라지거나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들인데.  연애와 사랑에는 환경과 취향을 뛰어넘는 어떤 진리가 있다고 믿는 내가 사랑의 소수자일까. 고리타분한 모더니즘의 인간일까.



그럼에도 나의 편애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은 잠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유형을 최소한의 큰 분류로 나누어 보고 싶다. 남녀노소. 이처럼 흔한 대분류법을 따라 사람을 나누어 보는 것은, 그 안에 나의 편애의 유형이 있고, 그것은 취향이라기보다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와 ‘노’를 편애한다. 내가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 자체보다는 여성성일 것이다. 본능적이고 거친 남자들에게는 없는 모태의 수용성과 공감성, 섬세함, 예쁨을, 나는 애절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속없는 남자들은 흔히 자신이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의 품보다는 여성성의 품이 그리운 것이다. 여자의 예쁨보다는 여성성의 예쁨이 말이다.



여자의 예쁨은 그러니까 상징화된 의미이자 표상화된 그리움이다. 하지만 남자는 표상만 보고는 의미를 다 알 수 없다. 외모가 인격화되어 표현되는 암호들을 가지고 의미를 감상하고 추리해야 한다. 저 여자가 정말 내가 그리워하는 여성성을 품고 있는 사람인지. 내 빛과 어두움을 한 품에 기꺼이 껴안아 모진 세상을 등지고 젖비린내 나는 품 안으로 나를 쏙 숨길 수 있는 이인지.



내가 좋아하는 ‘노’도 정확히 말하면 노인이라는 사람 자체에 한정되는 의미이기보다는 노년의 푸근함이라고 해야 더 본질적인 표현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할머니의 푸근함. 나는 할머니를 정말 좋아한다. 눈물 겨울 정도로 할머니의 치마폭이 그립다. 할머니의 치마폭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있을 때의 푸근함을 떠올리면, 잘하면 살 수 있겠다, 살아보고도 싶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여자, 노인, 두 가지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할머니를 편애하는 것이다. 눈물로 울지 않아도 숨결로 울 수 있고 살결에 안기지 않아도 영혼에 안길 수 있는 사람. 할머니의 여성성과 모성, 치마품. 그것은 나에게 치외법권 지역인 명동성당과도 같은 자리다. 마지막 품. 절대 사랑의 영역. 나의 신앙고백 안에서는 하나님이 바로 이 자리에 계시다.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사람이라면 아연실색할 정도로 하나님은 내게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할머니의 치마품이다.






둘.



지금 꺼내보려 하는 기억들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디테일한 느낌과 취향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늘 가변적이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변천과 발전을 거듭해 왔다. 가변적이어서 위태롭지만 그래도 너무나 소중하고, 나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설렘들에 대한 기억들. 그것들은 단수라기보다는 복수다. 그것들은 개별적인 존재로써 절대적으로 빛나는 빛이 아니다. 그것들과 결부되었던 우연한 시간이 빛나는 것이다.



가령 이런 이야기들.



삼학 년(열 살) 때는 피부가 하얗고 약간의 토끼 이빨에 토실토실하고 조신했던 미용실 집 딸 지영이를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면 아직 한참 낮이 남아있는 시간에 친구 상봉이와 함께 놀이터에 가서 그 여자애 이야기를 하며 놀곤 했다. 사 학년 때 좋아했던 애는 그녀와 정반대에 포지셔닝돼있던 여자애였다. 그 여자애는 철로 된 높은 사다리 기구를 육상선수처럼 올라가고, 남자애들과 씨름을 했다. 약간 말랐다 싶을 정도로 날렵한 몸 맵씨에 언제나 상기되어있는 듯한 두 볼과 눈빛을 가졌었다.



그 여자애의 활기는 지금까지도 그 느낌이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 애가 나타나면 겨울의 신선한 찬 공기가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미 당시에, 고작 이제 사 학년 짜리가, 그것도 무려  군사정권의 시대이자 가부장 시대였던 80년대 후반이었는데, 남자애 책상 위에 한 페이지를 거의 가득 채운 고백 편지를 써서 쉬는 시간에 살짝, 올려놓을 줄 아는 여자애였다.



물론 아무한테나 그러지는 않았고 내가 아는 한 그런 남자애는 한 명이었는데, 그 한 명은 물론 나였다. 더구나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있는 애가, 나를 포함해 누구도 섣불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그 여자애가, 나를 찍은 것이다. 나는 그 애와 남자 인생 처음으로 데이트 비슷한 것을 했다. 휴일 아침 같은 날, 그 애네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배드민턴도 치고, 눈이 펑펑 오던 어느 겨울날에는, 단 둘이 만나서 손 시린 줄도 모르고 눈덩이를 굴려 큰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판타지 같았다. 꿈처럼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아파트 앞길에서 펑펑 내리던 흰 눈을 맞으며 눈사람을 만들던, 그 겨울날의 기억이 나에게는 러브레터 회상 씬에 나올 법한 하루처럼 소년의 아련한 기억으로 남았다.



처음으로, 그 여자애 덕택에 나는 아이들과 무리 섞여 놀면서 은밀한 설렘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 애를 구해줄 다방구의 마지막 히어로가 되기도 했고, 놀이터 모래밭에서 당시 기준으로 가장 극단적인 스킨십이라 생각했던 씨름을 하기도 했다(극단적인 스킨십은 아마 나 혼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슬픈 일이 벌어졌다. 몇 달 후 아파트 단지 안에 새 학교가 생겼고, 그 애는 아파트에 사는 다른 애들과 함께 전학을 갔다. 그때는 전학 가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었다. 그래봐야 우리 학교에서 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나는 어디서 그런 걸 배웠는지,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 스탠드에 가서 팔꿈치를 허벅지 다리 위에 괴고 멍하니 앉아 하염없이 슬퍼했다.



중학교 때 나를 울렁거리게 했던 애는 얼굴의 반이 눈인 것처럼 기억되어 있을 정도로 우수에 찬 큰 눈을 가진, 검은 눈망울의 학원 여자애였다. 그 여자애는 약간 일본 동경 여중생 느낌마저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난 동경의 여중생을 본 적이 없었다. 일본 동경의 여중생이란 철학적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저 여자애일 것이라고 느껴질 만큼, 그 애의 귀여움이란 것은 충격적이었다. 온 마음이 다 술렁거렸다. 중1에게 공룡처럼 막연히 상상만 하던 아름다운 이성의 존재를 실제로 목격한다는 것은 정말 강렬한 것이었다.



그것이 당시 우리 동네에서 얼마나 진귀할 정도로 보기 드문 귀여움이었느냐 하면, 친구들의 호들갑 섞인 이야기를 듣자니 이랬다. 나의 부끄러운 친구들이 학원에 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그 여자애를 보고 무작정 그 애를 따라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애가 이상하게도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원래 친구들이 다니던 학원가는 길로 계속 앞서 걸어갔고, 급기야 우리 학원 건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연쇄적으로 친구들을 놀람과 환희에 빠트렸던 것은 그 여자애가 그 길로 우리 학원에 등록을 했다는 것이었고, 그 말인 즉 앞으로 우리는 이제 매일 학교가 끝나면 그 애와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게 될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저 검은 눈망울의 여자애와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들은(그리고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사건을 나는 공기로 기억하고 있다. 그날따라 유독 친구들의 오두방정이 이례적으로 심했다. 짐승들처럼 말도 제대로 못 하며 웃고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그 장난기 많은 남자애들이 쭈뼛거리고 부끄러워하며 얼굴 가득 행복해하기도 했다. 그런 광경의 인상이 고목나무처럼 점잖았던 나에게는 너무나 강렬한 파임이 되었다. 그날의 상기된 공기가 알프스의 공기를 담은 생수통처럼 내 인생에 남았다.



친구들은 몇 달 동안 다닌 자기들의 교실인데도 선 듯 교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작은 사무실 공간의 선생님 책상 옆에 있는 소파에 올라가서 네모난 큰 유리창을 덮고 있는 블라인드를 빼꼼히 벌리고 교실 자리에 앉아있는 그 여자애를 훔쳐보면서, 서로 마주 보며 괴성을 지르곤 했다. 흥분으로 가득했던 친구들의 리액션의 광기의 정도와, 불시에 그런 광경을 대하게 된 나의 이차적 충격으로만 보았을 때, 적어도 나에게 그날은 독일 통일이나 팔팔 올림픽 개막식보다 더 중요하고 경이로웠던 날로 기억되어 있다.



그때, 우리는, 고작 중1이었다. 정말 나로서는 그 애와 같은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혹은 꿈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와 저 동경 소녀가 친구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정도를 했다. 중1이니까 다들 그랬을 것이다. 우리 중 그 이상까지 꿈꾼 친구들은, 아마 용진이나 종만이나 상혁이, 준민이 정도를 빼고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 빼고는 거의 다였구나. 아무튼 우린, 사실상, 여자애들에게 센스 있게 말을 잘했던 종만이와 키가 크고 잘 생겼던 용진이의 활약 덕택으로, 그 여자애와 꿈처럼 친해져 갔다.



그 애와 함께 했던, 학원에서 단체로 눈썰매장에 놀러 갔던 하루는 내 인생에서 몇 날이 되지 않는 눈송이 같은 날이었다. 어느 날에는 오락실에서 만나서 동네를 걷고,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며 함께 놀기도 했고, 훗날 이제 거의 각자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멀어질 위기를 목전에 둔 삼 학년 성탄절 이브 즈음 해서는, 친구네 집에서 함께 맥주 서너 병에 과자 봉지들을 사 와서 밤새 노는 대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비좁의 방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가 쓰러져서 잠시 눈을 붙였던가. 새벽녘 즈음, 우리는 친구의 부모님께 걸리기 전에 다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친구의 자취방을 빠져나왔다. 부스스 나와보니 밖에는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어느덧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상쾌한 겨울 새벽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아름다웠다. 뿌드득 뿌드득 하얀 눈을 밟으며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 가슴 벅찰 정도로 설레고 신비로웠다. 열여섯 해의 삶까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아주 짙은 어둠과, 벅차도록 환한 빛이 오버랩되던, 굉장한 길티 플레주어의 새벽이었다.



숫기가 한참 부족했던 나는 친구들의 하이틴 로맨스 극장, 일반석 F열 정도에 앉아 깍두기처럼 함께 하는 레벨을 결국, 끝까지 넘지 못했다. 종만이와 그 애는 가끔 한 번씩 둘이 따로 만나곤 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내심, 아니 이글이글 마음이 불탈 정도로 부러웠다. 종망이가 미울만큼 질투하기도 했다. 종만이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왜 여자애들을 종만이처럼 웃기고 재밌게 해주지 못할까. 여자애를 만나는 것이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풀기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졌다. 소외감과 열등감,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모든 감정들보다도, 나는 그냥, 마냥 부럽고 뒤숭숭했다. 종만이가 우러러 보이고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훗날 나는 종만이에게 풍겨 나오는 담배 냄새까지 멋있어 보여서 친구나 여자애를 만나기 전에 일부러 줄담배를 독하게 피우고 가서 만나기도 했다. 풋내 나던 시간들의 누아르였다.



삼 학년이 끝나가던 어느 날인가는, 어떡하다가 나도 그 여자애네 집에 가는 방향까지 그 애와 단 둘이서 걸어보기도 했었다. 중학생의 짧은 보폭으로는 꽤 긴 길을 함께 걸은 것이었는데. 네가 너무 예쁘다, 너를 농구보다, 축구보다, 용진이랑 종만이보다 좋아한다, 외고에 가는 것보다 너를 만나는 것이 더 좋다는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그냥 나는 젠체하고 점잖을 뺐다.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과 행동들이 하나같이 서툴고 못난 모습들 뿐이었다. 노상 말 잘하고 잘 웃기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끙끙 앓기만 했던 날들. 인생 전체가 봄방학 같기만 하던 시간들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