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에서 '킬러문제', '킬러문항'을 뺀다는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의견 표명이 전국의 수험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 현장의 교사들까지 들썩이게 만들었다.
중학교에서만 10년을 보냈지만,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입학시키는 비평준화 지역에서 중3 담임을 몇 년 하다보니 고등학교를 보낼 때마저도 아이들의 최종 목표인 대학을 잘 보내는 고등학교를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진학 지도 해왔다.
참고로 중학교 시험은 과목별로 90점이 넘으면 모두 A 성취도를 받을 수 있다. 80점~90점 미만은 B 성취도를 받는다. 이런 평가 제도를 절대평가라고 한다. 다른 말로 '성취평가제'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가면 100명의 학생들이 경쟁을 했을 때, 1등부터 100명을 줄을 세운다. 아니 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평가이기 때문이다. 1에서 9등급으로 아이들을 줄을 세워 상위 4%까지는 '너넨 1등급!' 그 밑에서부터 7%까지는 '너넨 2등급!', 아무리 잘 해도 누군가는 9등급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다.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 등급제를 시작했다.(그 등급제의 첫 시작을 경험한 수험생이 바로 나와 나의 친구들이기에 그 혼돈의 시기를 기억한다.) 100명이 시험을 봤을 때, 1등에서 4등이 몇 문제 차이로 실력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해서 기인한 등급제이다. 그러니 1등에서 4등까지는 '너네 다 같이 1등해!' 라는 생각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2등급의 머리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코 앞에서 닫힌 1등급의 문. 그보다 억울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은 더욱 더 1등과 100등을 확실히 줄 세우고 싶어진 것이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킬러 문항"이다.
확실한 1등을 만들어 줄 "킬러 문항".
수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 학교의 수준에 따라 각 과목 교사는 확실한 줄을 세우기 위해 킬러 문항을 만든다.
"어떻게 해서든 1명만 맞고 다 틀려라."
"응시생들의 점수를 kill 하라." 라는 마음으로 만드는 문제들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나는 놈, 그 위에 나는 놈'을 이기기 위해 아이들은 자신의 사력을 다해 공부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줄 세우는 데만 급급하여 정작 100등의 배움은 누구도 관심갖지 못한다. 60등의 성장엔 관심이 없다. 다 같이 같은 것을 배우지만 누군가는 제일 점수가 낮아야만 하는 것이고, 고등학교 영어 시험의 평균 점수가 40점, 50점대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제도에서 교육은 사라졌고, 학습은 사라졌다. 30명이 함께하는 학급에서 나 빼고 29명이 경쟁자인 3년의 고등 시절을 상상해보아라.
이 시스템 속 킬러 문항이 킬링하는 것은 학생들의 점수가 아니고, 바로 우리 아이들 그 자체다. '아이들의 시간',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아이들의 친구', '아이들의 배움'을 킬링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현재 고등학교 시절은 이렇지 않을까?
고등학교 입학하는 순간, AI가 점유한 이 세상에서 자기를 탐구할 시간도 없이 유망한 직업을 정하고 진로를 정해 생활기록부를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숨 돌릴 때쯤 각 교과마다 해야 하는 수행평가. 그것마저도 '쟤'보다 더 잘 해야 한다. '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낸다. 어디에도 '나만의 것'이 없다. '쟤'보다 더 잘해야 한다. 매일 남과 비교하는 생활 속에서 3년을 보낸다. '내'가 뭔가를 재밌어 하고 잘 한다고 해도 '쟤'보다 못 하면 의미가 없다. 친구는 같이 급식 먹으러 갈 정도면 되고, 저 친구보단 내가 잘 해야 대학 간다는 마음으로 괴롭다. 100점을 받았는데 '쟤'도 100점이면 같이 2등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킬러 문제가 없어서 킬링 당했다.
이렇게 줄 세우기식이, "공정함"이 우선되는 교육 현장에서 우리가 이제 성찰해야 하는 것은 사교육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고 말고를 떠나, 킬러 문항을 없애느냐 마느냐를 떠나, 수시냐 정시냐를 떠나 아이들이 어떻게 급변하는 미래에 적응하여 사회의 일원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 바로 그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STOP을 외쳐야 멈추고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언젠가부턴가 시스템 속 부속품으로서 작용하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나는 무력감에 빠진다.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교사의 마음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교사들은 언제 STOP을 외치고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오늘도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학교에 잘 와주길, 이탈하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