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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

좋지만 싫은, 싫지만 좋은

by 사부작

‘대목’.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자영업자들은 다음의 의미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습니다. ‘설이나 추석 따위의 명절을 앞두고 경기(景氣)가 가장 활발한 시기.‘ 꽃집 사장님들에게 경기가 가장 활발한 시기라 하면 누가 뭐래도 가정의 달이지 않을까 합니다. 오픈 후 얼마 안 있어 가정의 달을 맞은 아내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시기를 잘 보내야 현실적으로 조금이나마 더 나아질 거라는 부담감,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죠.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그녀에게 가정의 달은 무거운 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 그녀는 자주, 시험준비가 안된 채로 시험을 보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도 준비가 안된 채로 시험 날을 맞이하는 그런 감정을, 가정의 달을 준비하면서도 느낀 게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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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에 있어 가정의 달의 메인이벤트는 역시나 '어버이날'이고, 일반적으로 어버이날 준비는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전부터 시작합니다. 아내의 꽃집에서 그렇듯, 다른 가게들도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님에게 전달하는 작은 카네이션 바구니를 대량으로 준비하는 꽃집에서부터, 상품 디자인에 비중을 많이 두고 젊은 층이나 꽃을 많이 소비하는 층을 타겟팅하여 준비하는 꽃집까지 그 방식과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가 바쁘게 어버이날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그렇다는 건 곧, 이 시기 꽃집들이 다른 가게들과 자연스레 경쟁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평소에도 상권 내에서의 경쟁은 계속 존재하지만, 대목에는 꽃을 수요 하는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에 경쟁에 밀리는 경우 기회비용 또한 평소보다 많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경쟁이 좀 더 치열해지는 거죠.



어버이날 상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될지에 대한 가이드는 어디에도 없기에, 아내는 SNS를 통해 다른 꽃집은 어떤 아이템을 준비하는지 언제부터 예약을 받는지 수시로 확인하더군요. 그리고는 고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만한 레퍼런스를 찾고 어떻게 그녀의 스타일로 재해석할지 고민했습니다. 꽃 색감과 구성, 그걸 담아내는 오브제와 포장들을 상품 라인업별로 정하면, 본격적으로 '어버이날 시즌 상품 판매'를 위한 사전 준비가 시작됩니다. 상품별 가격대를 감안해서 예상 판매량을 정하고, 그에 맞게 미리 사놓을 수 있는 부자재와 집기들을 구매합니다. 사업 초기에 재고는 부담이므로, 최대한 정확하게 판매량을 예측하고 싶지만 초보 사장님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당시, 부자재로 보자기를 활용하기로 해서, 동대문 원단 상가를 방문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보자기 주문 수량이 클수록 할인 폭이 크다 보니 고민하다가 많은 수량을 샀었는데, 역시나 대목 시즌이 끝나고 난 후 재고가 많이 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그 보자기들은 2년이 지난 후에도 가게 구석 수납장에 고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부자재는 재고에 대한 부담 외에는 준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문제는 '꽃'인데요, 어버이날 시즌의 꽃 도매 시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입니다. 전국의 모든 꽃집이 일시에 도매 시장에서 꽃을 구매하는데, 각 소매업장에서 얼마나 꽃을 수요 할지, 도매시장에서 공급하는 꽃이 어떤 종류일지, 공급량이 얼마나 될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리 생각한 꽃들을 주문 수량에 맞춰 구매할 수 있을지 담보할 수 없습니다. 상품 구성에 수입 꽃이라도 들어가 있으면, 해외에서 꽃이 들어오는 날짜, 당시의 국제 정세로 인한 물류 이슈 등에도 영향을 받으므로 꽃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아내 또한 이 부분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매시장 상인 분들께 미리 여쭤보아도 '글쎄, 들어올 거 같긴 한데, 잘 모르겠어.' 정도의 답변만 돌아올 뿐입니다. 예약 건만 있는 게 아니라, 당일날 주문이 들어오기도 해서 어버이날 기간 내내, '상품을 제대로 준비해서 팔 수는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지속됩니다.



가시지 않는 불안함을 잠시 제쳐둔 채로, 어버이날 2-3주 전 상품 예약 오픈을 시작하면 이번에는 '문의는 있을까?'라는 걱정이 찾아옵니다. 문의가 없으면 문의가 없는 대로 매출 때문에 고민, 문의가 있으면 있는 대로 상품 준비에 문제는 없을지 고민인 셈입니다. 다행히, 오픈 초기 가게 상황을 감안하면 그리 적지 않은 양의 예약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가족 중 누군가 꽃집을 하면 어버이날에는 온 가족이 도와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약 일정에 맞춰 새벽 꽃 도매시장에 가서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대량의 꽃을 구매하고, 가게에 와 아침까지 꽃을 정리하는 일만 하더라도 혼자 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아내에게 어느 정도의 노하우와 경험이 쌓여 그때보다는 더 수월하게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해내기 힘든 일임은 분명합니다.



'대목'이 시작하는 시기, 꽃 도매시장에 아내와 같이 갔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장이 개장하는 밤 11시 30분이 되기 전부터, 고속터미널 꽃 상가에 속속들이 꽃 가게 사장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하는데요, 북적이는 주차장과 상가 안 분위기는 개장 후 '인산인해'로 바뀝니다. 그 발 디딜 틈 없는 곳에서 원하는 꽃을 찾아 헤매는 건 여간 정신없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아내가 산 꽃들을 들어주는 역할만 했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통에 아내를 놓치기 일쑤였습니다. 꽃을 파는 상인의 고함과 꽃을 사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은, 새벽까지 계속됩니다. 누군가는 곤히 자고 있을 그 시간, 고속터미널 상가에서는 또 다른 세계의 낮시간이 펼쳐지고 불야성을 이룹니다.



그렇게 첫대목이 지나가고 마지막 주문을 마무리한 그날, 아내가 너무도 후련해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계속 긴장한 채로 밤낮없이 일주일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이제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서는, 아쉬웠던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정리하고 있는 걸 보면, 진짜 사장님이 돼 가는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고객분들이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셨다, 감사하다.' 등의 후기를 남길 때는 나름의 보람과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아내는 정작 자신의 부모님에게 감사함을 전달하지 못하는 현실에 서글퍼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대가를 받고 꽃을 만든다지만, 다른 부모님들을 위해서는 밤을 새워서 꽃을 만드는데, 정작 본인의 부모님을 위해서는 카네이션 한 송이 직접 전달드리지 못한 현실이 아이러니했던 것이죠.




크리스마스나 새해처럼 구체적인 시기는 모두 다르겠지만 '대목'이 뜻하는 바를 생각해 보면, 그 시기는 보통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함께 모여 무언가를 기념하고 감사함을 얘기하는 날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현실적인 이유로, 여러 자영업에 종사하시는 사장님들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고, 어쩌면 평소보다도 더 외로이 고군분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내 말대로 자영업자에게 '대목'은 '좋지만 싫은, 싫지만 좋은' 애증(愛憎)의 대상이 아닐까 합니다. 사장님으로서의 한 챕터가 그렇게 또 쓰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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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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