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독후감
바람마저 처연하게 사람을 뒤흔드는 고요한 눈길 속, 한 남자가 서 있다. 쏟아지는 눈송이에 가려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흐리다. 착각이었을까. 잠시 멈추어 섰다 다시 제 길을 가는 그이의 눈빛이 잠시 이쪽을 건네 보는 듯도 하다. 그를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가위에 눌린 듯 내 두 손은 움직이지 않고, 두 발도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보낸 뒤에도 오랜 동안 마음으로 보내지 못했다. 아버지를 영원히 보내야 했던 그날의 풍경이 방금 전 일처럼 생생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마치 막내딸의 결혼식장에 손을 잡고 함께 입장하는 것이 당신 생의 가장 큰 책임이었던 것처럼. 나의 아버지는 어떤 유언도 없이 언젠가 우리 가족이 다시 모일 그곳으로 먼저 여행을 시작했다.
발인 날, 포근했던 전날과 달리 새벽녘부터 갑자기 폭설이 쏟아졌다.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조금 전 제설차가 지나간 자리가 금세 하얗게 덮일 만큼, 말 그대로 폭설은 폭설이었다.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운구차가 움직이지 못하면 어쩌나 대책을 고민하는 사이, 나는 머리에 꽂은 핀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하지 못한 말이 많아 하늘을 붙잡고 있는 거면 어쩌나’
‘우리 얼굴을 한 번 더 쓸어보고 만져보고 가보고 싶은 거면 어쩌나’
눈이 그치길 바라야 하는지 계속되길 기도해야 할지, 이제 곁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꿋꿋이 제설차와 비질을 총동원해 눈길을 헤치며 가다 서다를 반복한 끝에, 운구차가 움직였다. 그렇게 결국 차갑게 식어버린 아버지를 더 차가운 곳에 두고 왔다. 그 후로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내 안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냉기마저 얼어버릴 눈 속에 있었다. 나 역시 그 시간 속에 얼어붙은 채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 아이만이 반짝거린다고 감탄하던 사람. 퇴근길에 초콜릿이며 사탕을 주머니에 숨겨뒀다 내 작은 입에 슬쩍 넣어주던 내 젊은 아버지. 아들딸이 태어나 말을 하고 걸음마를 하고 글을 읽고 키가 크고, 다함께 둘러앉아 밥 한 끼 먹는 수없이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을 기특해했던 아버지. 온기가 생생한 유골을 차가운 함에 담고 더 추운 납골당에 아버지를 두고 돌아서야 하는 그 순간, 차마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얀 입김마저 가려버리는 눈길 뒤로 어찌 아버지를 홀로 두고 올까. 따뜻했던 사람을 어찌 차갑게 잊을까. 함께 있을 때에도 효자가 아니었던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아버지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달님 작가의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를 만났다. 그리고 프롤로그만으로 이미 나는 위로받았다. 눈이 내리면 하늘에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는 저자의 가족이 들려준 말에, 나와 아버지를 가로막던 빙벽이 봄을 맞은 듯 녹아내렸다. 주변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껴안는 작가의 다정한 시선에서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쏟아지던 눈은, 어차피 가야하기에 갑작스런 이별조차 설레는 소풍으로 받아들인 아버지의 인사였던가 보다. 그러니 결코 자신으로 인해 내내 슬퍼하거나 다가올 행복에 죄책감을 갖지 말아달라는 눈꽃의 의미를 너무나도 늦게 깨닫고서, 어느덧 중년에 들어선 막내딸은 뒤늦게 묵은 울음을 운다. 이제야 한 뼘을 자란다.
지친 저녁 북적이는 전철에서 빈자리를 발견하는 행운에, 먼저 환하게 아침 인사를 건네주는 버스기사님의 호의에, 성공적으로 마친 프로젝트를 기념하며 함께 맥주 기울이는 남편의 동그란 얼굴에, 아버지를 닮은 아재개그를 구사하는 형제가 곁에 있다는 감사함에, 여름과 가을 사이 붉어지는 노을의 눈부심에, 커다랗게 써 붙인 초보운전 종이에 각자의 처음을 상기하며 속도를 줄이는 무명의 친절에, 나는 조용하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아끼던 아버지를 발견한다.
종종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도 잘 지내니, 그대도 잘 지내라고. 우리 다시 만나자고. 닿지 못할 인사를 건넨다. 죽음마저 삶의 일부인지라 마지막 순간마저 기꺼이 껴안은 당신처럼, 당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당신의 자랑이 되겠노라고. 그렇게 오늘도 아버지가 물려준 삶의 빛을 주워 담는다. 날마다 새롭게 다정하게 그리고 진심을 담아.
2024 창원의 책 독후감 공모전 입상작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 저자 김달님 출판 미디어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