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려~ 잘했어."

by 수정

요즘 내가 엄마에게 자주 듣는 말은
"그려~ 잘했어."이다.
얼마 전 동지 때 엄마에게 안부 겸 전화를 걸어 팥죽은 드셨는지 물으니 세 솥이나 끓여 네 집이서 나눠 드셨다고 한다. 역시 엄마는 못 말린다.
나도 팥죽을 끓여 맛있게 먹었다고 하니 "그려~ 잘했어." 하신다.

몇 달 전에도 잘 쓰던 청소기가 갑자기 고장이 나 새로 샀다고 말했더니 또 "그려~ 잘했어." 하신다. 명절에 친정에 갔을 때 엄마가 챙겨준 좋은 와인을 드디어 다 먹었다고 빈 유리병 사진을 톡으로 보내니 엄마는 또 "그려~ 잘했어." 하신다.

엄마는 내가 뭐만 하면 다 잘했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해서 나를 웃게 만든다.

하지만 어릴 때 나와 동생은 엄마한테 많이, 그리고 자주 혼났다. 내가 봐도 우리가 좀 혼날 짓을 많이 하긴 했었다.
88 서울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성화봉송 주자들은 아테네로부터 출발한 성화를 들고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전국 곳곳을 이어 리며 서울로 향했고 그날은 우리 동네 앞 큰 도로로 지나는 날이었다. 소식을 들은 우리는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그 도로가에 나가 생애 처음 성화를 들고 달리는 긴 행렬을 구경했다. 그 뒤로 우리 마음속에도 성화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는데 급기야 나와 내 동생은 직접 성화봉송 주자가 되어보고 싶은 마음에 집에서 신문지로 성화를 만들어 거실에서 뛰어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침 엄마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고 우리는 신문지를 길게 말아 손에 쥐고 윗부분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신문지는 순식간에 타버려 재가 되었고 우리는 우리가 봤던 꺼지지 않는 성화와 너무 다른 재로 변한 신문지에 당황했다. 놀란 마음에 현관문을 열고 빗자루로 재빠르게 재를 쓸어 밖으로 보내려는데 마침 바람이 집 안으로 불어 들어와 재는 현관문 밖에 아니라 거실에서 춤을 추며 돌아다녔고 그 순간 어디선가 등장한 엄마는 그 꼴을 보고야 말았다. 엄마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하셨고, 우리가 쓸던 빗자루는 매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잘못해서 거실 커튼에 불이 옮겨 붙기라도 했더라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다. 우리의 의도는 순수했지만 정말 맞아도 쌌다.

또 하나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그날은 어째서인지 나 혼자서만 집에 있었고 주산학원에 갈 시간이 되어서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의 빨간 지갑이 눈에 띄었다. 그냥 호기심에 열어보았는데 50원짜리 동전 하나가 나를 유혹했다. 날은 더웠고 학원 가는 길에 50원으로 쮸쮸바나 하나 사서 먹으면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뭐에 홀렸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그 50원을 들고 집 근처 슈퍼에서 쮸쮸바를 하나 사서 맛있게 먹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바로 그 순간 엄마를 정면으로 마주치고야 말았다. 엄마는 돈이 어디서 나서 아이스크림은 사 먹느냐고 물었고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힌 나는 우물쭈물거리다가 엄마의 지갑에서 동전을 훔친 것을 들키고 말았다. 엄마는 화난 얼굴로 학원에 갔다 와서 보자는 무서운 말을 남기고 떠나셨고 나는 그 뒤로 엄마에게 혼날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이 학원에 갔다 왔다. 그날도 나는 엄마에게 먼지가 탈탈 털리도록 매를 맞고 혼이 났다.

나와 동생은 둘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연년생이라서 친구처럼 잘 놀았고 각자의 친구들보다 우리끼리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둘이서만 할 수 있는 놀이들을 만들어 놀곤 했는데 기둥에 고무줄 한쪽을 묶고 한 명이 반대쪽 줄을 잡으면 다른 한 명이 고무줄을 넘는다든지, 요즘 유행하는 노래에 둘이서만 아는 새로운 쎄쎄쎄 동작을 만들어한다든지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 집에는 큰 어항이 하나 있었는데 방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팔을 바닥에 받치고 앉아 어항에 발을 대고 발을 살살 동동 구르는 것도 그런 놀이 중에 하나였다. 그렇게 하면 발도 시원해지고 어항 안에서 우리의 발을 피해 여기저기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평소처럼 방바닥에 앉아 어항에 발을 올리고 동동거리며 놀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어항이 깨지고 말았다. 어항에 있던 물과 물고기들이 유리조각과 함께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고 놀란 우리는 황급히 일어나 피했지만 옷은 이미 물에 젖어 버렸고 바닥에는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나와 동생 모두 유리조각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놀라서 달려 나온 엄마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으셨다. 다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우리는 또 엄마에게 엄청나게 혼나야 했다.

아무튼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서, 둘이 맨날 싸워서, 항아리 뚜껑을 깨 먹어서, 숙제를 미루고 제때 안 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혼나고 야단을 맞았다. 매도 맞고 쫓겨나기도 하고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우리가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는 더 이상 매를 들지 않으셨고 이제는 엄마 아빠보다 너희가 더 많이 배우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알 수 있는 나이이니 엄마가 혼내지 않더라도 각자의 할 일들을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내 기억에도 그 뒤로는 엄마에게 크게 혼났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엄마는 내가 무엇을 샀다고 해도, 무엇을 먹었다고 해도, 어디를 다녀왔다고 해도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만 하신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어릴 때 엄마에게 그렇게 많이 혼나서 나는 사람 구실을 하며 살게 된 것 같다. 형제끼리 맨날 싸우면 안 된다는 걸, 불장난이 위험하다는 걸,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는 걸, 남의 물건에 손대면 안 된다는 걸, 할 일을 미루면 안 된다는 걸 엄마에게 혼나며 배웠다. 엄마의 야단 덕분에 지금은 어디서 욕먹지 않고, 나쁜 짓은 하지 않는 멀쩡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는 엄마의 말이, 엄마의 매가, 엄마의 야단이 아프고 눈물이 났지만 지나고 보니 다 약이 되었다. 어릴 때 많이 혼났으니 이제는 칭찬만 들으며 살아도 되겠지? 엄마가 나에게 해주는 "그려~ 잘했어."라는 말이 나는 참 좋다.




2025년이 밝았네요. 아직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보다는 지난해 일어난 많은 일들로 무겁고 애통한 마음이 더 크지만 그래도 힘을 내 봅니다.

다들 무탈하고 평온한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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