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지 떼고, 오로지 실력만 볼 것
연대 대학 시절, 영문과에 개설된 영문학 에세이 수업을 신청하러 간 적이 있다. 신학과 영어는 부전공이 없어서 들으려면 담당 교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이야기를 듣던 교수는 무슨 과냐고 했다. ‘신학과입니다.’라고 했더니 대뜸 ‘음…. 이 수업은 매우 훈련이 잘된 학생들이 듣기 때문에….’라며 안 된다고 했다. 잠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던 나는 몇 번 더 물어본 다음에야 거절의 이유를 깨달았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듣는 강의’라는 말이었고, ‘신학과 출신은 감당을 못할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당시 토익 시험 전국 2등 성적표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영어 잘하니 결과에 대해선 내가 책임지겠다’라며 항의해 봤지만 결국 그녀는 끝끝내 나의 수업 진입을 허락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학기에 다른 교수 강의를 들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A를 받았다.
명문대에 합격한 사람들과 일해 보면 확실히 인재가 맞다. 문제는 비명문대나 비인기 학과 출신 중에도 인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걸 사회 전체가 통째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봐야 스카이캐슬 출신이 인구의 1%도 안 되는 상황에서 무슨 ‘흑인이 피부색이 더 검은 흑인을 무시한다’는 식의 자학에 전 국민이 도취하여 살아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위의 일화와 같은 일을 한국인은 생활 속에서 수도 없이 겪는다.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도 대기업에 이력서를 낼 수 조차 없었다. 당시에는 아예 전공과목을 ‘상경계열과 어문계열’로 제한해 공고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학원 강의로 방향을 틀었(다기보다는 할 게 그거밖에 없었)고 그나마 학원 중에서도 전공을 안 보고 영어 영어 실력만을 봐준 유일한 강남 어느 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학생 재등록으로 냉정히 강사를 평가하는 시스템은 그제야 내게 날개를 달아 줬다. 몇 년 지나 학원에서 최고 강사가 되자 EBS에서 콜이 오기 시작했다. 한걸음에 달려가 오디션을 받고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또 그놈의 멍청한 국가적 ‘필터 시스템’이 내 길을 막았다. 비유학, 비석사, 비전공 강사는 EBS가 쓴 적이 없다는 것. 그렇게 10년간 3번의 오디션에 3번 낙방했다. 이렇게 길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은 이 땅에 사람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간판만(그 간판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능력과 실력이 일생동안 천변만화하는데 일생 중 딱 한 번 18세의 어느 날 어느 시에 측정한 특정 능력을 기준으로 평생을 차별받거나 특별 대우받게 하는 시스템이 너무나 멍청하다는 것이다)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국가적인 낭비요, 개인에겐 한을 남기는 일인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한국에도 시작되었던가. 각계 각 분야에서 권위가 무너져 내리던 2000년대 초의 어느 날, 나는 다시 EBS로 불려 갔고 ‘위기의 방송국을 구하기 위해 특이한 것이 필요하다’는 내부 결정에 따라 ‘엽기 강사’의 딱지를 달고 처음으로 ‘중앙무대’에 올랐다.
38세 때의 일이었다.
17세에 코리아헤럴드 전국 영어 웅변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대학 시절 각종 영어 대회에서 단 한 번도 등수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사람이 (자랑하려고 하는 말 아닌 거 아시죠? 피눈물 나는 말인 것도요) 중앙 무대에 서는 데 20년이 걸린 나라다. 단 하나의 이유, 내가 전공자도 유학자도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 나라를 간절히 바꾸고 싶었다. 이 나라에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지적이기로 유명한 미국의 앵커 피터 제닝스는 중졸의 학력으로 국민 앵커의 자리에 올랐다. 오로지 실력만 보는 풍토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뭐, 아시다시피 테크니컬하게는 잡스도, 게이츠도 고졸 아닌가. 그래서 나라도, 지금이라도, 뭐라도 이걸 바꾸는 데 투신(?)하고 싶어서 결정했다. 사다리 필름은 오로지 경력과 포트폴리오만 본다. 학력 기재란은 아예 없앨 예정이다. 지금 20대라면, 적어도 자기가 실력 있는 걸 인정받는 데 20년씩 걸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