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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May 14. 2022

텃밭에 부추 심기

봄맞이 텃밭 노동의 시작

"오늘 정구지 좀 사 와서 심자."

"?!!"


 마당 그늘막에서 초여름을 앞두고 털갈이하느라 부숭부숭해진 뿌꾸의 등허리 털을 빗겨주고 있던 나에게, 텃밭을 둘러보던 아빠가 툭 말을 건넸다. 이 맘 때쯤의 뿌꾸를 쓱 문지르면 누런 털이 퐁퐁 솟아나 코 끝을 간지럽혔고, 우리 집 마당에는 뿌꾸한테서 빠진 겨우내 묵은 누렁 털이 둥둥 떠다녔다. 새로 난 털과 헌 털이 섞여 뿌꾸가 털 삐죽 못난이가 되면, 나는 본격적으로 봄이 왔음을 느낀다. 화사한 봄 햇살이 비추면서 부모님의 시골집 마당에는 초록빛 생기가 넘쳐흘렀고, 텃밭에는 이미 고추, 적상추, 양파 등이 빽빽하게 심겨 있던 차였다. 여긴 뭐 심을까 하며 텃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었던 아빠의 선택은 정구지, 즉 부추였다.


빠진 털로 뿌꾸 한 마리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마당에 둥실 거리는 뿌꾸 털

 

 동네 종묘상에 들러 모종을 세 줄 사 왔다. '모종 한 줄에 여덟 개, 세 줄이면 스물네 개. 금방 심겠구먼' 하고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나도 이제 제법 시골 텃밭일에도 익숙해졌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모종은 배양토에 심어져 있는데, 보통의 흙보다 까만 배양토에 검지 손가락을 밀어 넣어보니 배양토가 조금 말라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년에 심은 모종들은 배양토가 촉촉한 상태였는데. 잘 살리려면 심자마자 물을 듬뿍 줘야겠구나 싶었다. 나 이 정도면 우리 집 텃밭 담당은 못하더라도 텃밭 입구 지킴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얄궂은 생각을 했다.


모종 등장!
요렇게 칸을 잘 나눠서 간격을 잘 유지해 심으라는 아빠의 말씀


 예상했던 대로 아빠는 내 손에 모종삽을 쥐여주셨고, '여기 조그만 구획에 간격 잘 맞춰 심어봐라'하며 대충 시범을 보여주시고, 고추 모종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대를 심는 작업을 하러 가셨다. 사실 얼마 전에 텃밭에 부추를 심었었는데, 그게 다 말라죽어버렸다나. 그래서 다 걷어내고 새로 심는 거라고 하셨다. 밭에 거름을 준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종을 심어서, 땅이 독해서 아기 모종이 죽어버린 걸까. 그 이후 시간이 좀 지나고 비도 조금 내렸으니 괜찮으려나. 그래도 내가 심는 부추 모종은 잘 자리 잡고 자랐으면 싶은 마음에 괜히 흙을 헤집어서 부드럽게  만들었다.


배양토에 쏙 박혀 있는 모습이 귀엽다


 부추 모종을 심는 일은 간단하다. 모종 뿌리가 잘 자리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모종삽으로 땅을 파고, 모종을 플라스틱 통에서 쏙 빼서 파 놓은 구멍에 넣고 흙을 덮어준 뒤 단단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흙을 꾹꾹 눌러준다. 그리고 잘 심어준 모종 바깥으로 동그란 고랑길을 내준다. 이웃에서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가 이렇게 하면 나중에 물을 부어주었을 때 물이 고랑에 고여 천천히 흙으로 흡수되기 때문에, 모종이 물을 더 잘 흡수할 수 있다고 했다.


모종삽으로 심을 자리를 잘 파준다


 플라스틱 통에서 하나씩 톡톡 모종을 꺼내는 손길이 리드미컬하다. 오랜만에 하는 텃밭 일이고 어렵지 않은 작업이라 의욕이 생겼다. 모종 뿌리 위로 흙을 덮을 때마다 부디 잘 자라거라 하는 마음을 담았다. 종묘상에서 모종이 땅에 놓여있었는데, 은근히 뜨거운 봄햇살과 달아오른 지열을 받아 조금은 시들시들해 보였다. 얼른 심고 물 주면 모종도 힘을 내겠지, 뿌리가 잘 자리 잡았으면 하는 마음에 모종을 심고 난 흙을 한번 더 단단히 다졌다. 시골의 땅과 해와 비가 가지는 힘은 의외로 막강해서 웬만한 식물들은 다 키워내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하며 바라본 부추 모종은 너무나도 조그맣고 여려 보였다.


모종 심은 주위로 동그랗게 고랑을 내고, 이런 식으로 주변에 물이 고이도록 조심스레 물을 준다


 모종에 주는 물은 우리 집 마당 한편에 있는 어항에서 가져온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항과 연못의 사이 어디쯤이라고 표현해야 어울릴 법한, 우리 집 물고기들의 서식처다. 내 팔뚝의 반만 한, 제법 큰 금붕어 몇 마리와 부레옥잠이 있는 조그마한 연못에서 퍼온 물은, 아무래도 일반 수돗물보다는 훨씬 식물에게 영양가가 있을 거라는 게 우리 아빠의 생각. 그래서 나는 연못 물을 바가지로 길어다가 부추 모종에 조심스레 부어주었다. 물을 한 번에 부으면 흙이 쓸려 내려가거나 아직 자리잡지 못한 모종 뿌리가 기울 수 있기 때문에 조금씩 여러 번에 거쳐 나눠서 조심히 부어주어야 한다. 물 먹은 흙을 보니 모종 심느라 살짝 열이 올랐던 내 얼굴의 온도도 내려가는 듯했다. 부추 심기를 마무리하던 내게 아빠는 또 다른 미션을 넘겨주셨다.


작고 소중한 부추 모종


"요새 통 비가 안 왔으니 마당 화분이랑 나무에 물 좀 주거라."

  

 텃밭  주기라면 양동이에 담은 물을 바가지로 붓는 걸로 충분하지만 우리 마당 전체에  주기라면 스케일이  커진다. 마당의 수도에 기나긴 고무 스를 연결해서  마당을 돌아다니며 물을 줘야 한다. 끝에 달린 손잡이 레버로 수압이나  뿌려지는 범위도 조절할  있다. 개인적으로는 시골집에서 하는 일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거운 잔디깎이 기계를 조작해가며 마당을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잔디 다듬기, 허리가 혹사당하는 듯한 텃밭 작물 가꾸기나 잡초 뽑기보다 한결 몸이 편한 데다, 물을 맞는 순간 식물들은 바로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식물들에게 생명력을 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마당 가장 안쪽에 있는 블루베리 나무부터 시작해 데크 위에 놓인 크고 작은 화분들에게도 골고루 물을 준다. 공중에 물을 흩뿌리면 건조한 잔디도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특히 화분에는 물을 듬뿍 줘야 하는데, 넓은 마당의 흙은 연결되어 있어 수분을 오래도록 머금을 수 있지만 화분은 흙의 양이 작아서 금세 다시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식물에 너무 자극이 가지 않을 정도로 수압을 잘 조절해가며 물을 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어려울 게 없지만, 이 작업을 할 때에는 의외의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바로 우리 뿌꾸다.


언니가 들고 오는 물줄기에 상심한 뿌꾸, 간식으로 풀어주는 수밖에


 뿌꾸는 물을 정말 싫어한다. 한여름 해가 쨍쨍할 때 털 옷 입은 뿌꾸가 가여워 설치해준 마당 수영장을 절대 거부하며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 쳤던 역사가 있고, 목욕이라는 말만 들어도 숨어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덕분에 뿌꾸를 목욕시키려면 내가 뿌꾸를 안아 들어서 욕실로 납치해야 하는 지경이다.


 보통 우리 가족이 마당일을 할 때면 뿌꾸는 헤에~하고 웃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어찌나 이쁜지, 절로 간식 주머니를 열어 자꾸 간식을 건네주게 된다. 그렇게 순하고 예쁜 뿌꾸지만 물을 너무도 싫어하기에, 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는 내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나를 원망하는 눈빛의 뿌꾸를 보고 있자면 미안해서 얼른 물 호스를 잠그고 싶어 진다. 특히 뿌꾸집 마당에 있는 식물에 물을 줄 때, 뿌꾸는 나를 잔뜩 째려보고는 자기 집안으로 휙 들어가 버린다. 무안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뿌꾸의 시야에 들어오는 구역에는 물을 후다닥 주고 빠르게 정리한다.


잘 자라줬으면 좋겠다


 심어둔 모종이 잘 자리 잡고 자라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뿌듯해진다. 특히 비가 내린 다음 날 해가 쨍쨍할 때 들러보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진 식물들을 볼 수 있는데, 정말로 기분이 좋다. 올봄, 내가 담당한 것은 부추. 저 부추가 얼른 잘 자라서 우리 집 식탁에 오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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