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시간이 됐다. 오늘 웬일인지 아침부터 할머니도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다. 공장도 문을 열지 않았다. 종일 나를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게 엎드려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팠다. 여자가 입혀준 옷에는 내가 좋아하는 간식 냄새와 여자의 냄새가 잔뜩 맺혀 있다. 그 냄새를 맡으니 묘하게 안심이 됐다. 내일은 할머니가 오겠지. 아니, 그전에 조금 있으면 여자가 올지도 몰라. 같이 산책을 해주겠지. 맛있는 간식도 잔뜩 주겠지. 어쩌면 오늘 내가 밥을 못 먹은 걸 알고 쿠키를 한가득 밥그릇에 부어줄지도 몰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본다. 빨리 와서 나랑 같이 산책해요.
다리에 힘을 주고 달리는 체를 해본다. 요즘은 여자가 산책하면서 자주 같이 달려주는데,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종종거리며 걷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털 가닥가닥 바람이 스미는 것도 숨이 차오르는 것도 좋았다. 코 끝에서부터 꼬리털 끝까지 모든 감각이 생생 해지는 느낌이었다. 달리면 말이지, 나는 저 자동차들보다 빠를 거야.
기분에 취해 너무 많이 앞으로 나아가 버렸다. 아차, 목줄이 당겨서 아프겠다 하는 생각도 잠시, 목을 옥죄는 느낌이 없었다. 이상하네 하고 뒤돌아보니 달그락 하고 쇠사슬이 바닥에 끌린다. 몇 걸음 더 조심스레 앞으로 내디뎌 본다. 하나, 둘, 셋, 넷. 쇠사슬이 기둥에서 툭 떨어졌다. 지금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잡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지? 이제 나는 마음대로 뛰어도 되는 건가 봐. 마음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뛸 거야!
네 다리에 체중을 싫어 단단한 바닥을 딛는다. 자라난 발톱에 생생하게 맞닿는 차가운 지면의 느낌. 한 달음에 공장이 등 뒤로 멀어졌다. 찬 바람이 눈에 스며 시리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여자와 산책을 하며 봤던 익숙한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번쩍거리는 간판들 사이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 목줄이 없는 사람들이 자유로움을 과시하는 듯한 모습이 늘 부러웠지만, 지금은 나도 저만큼 자유로운 것 같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나에게 뭔가를 던지지 말아 주세요, 나는 뛰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달리고 있는 지금은 돌멩이쯤 맞아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너무 빠르니까 맞힐 수도 없을 걸? 혀를 빼꼼히 내밀어본다. 숨이 차서 입이 벌어지고 침이 줄줄 흘렀다. 그렇지만 계속 달리고 팠던 시동이 걸린 마음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늘 가보고 싶었던 저 모퉁이 너머의 세계도 볼 거야.
등 뒤로 날개가 돋는다. 하늘을 날았던 기억이 나, 발이 조금씩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자고 있던 온몸의 세포가 되살아난 감각으로 거리의 냄새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무를 한가득 덮은 다른 개들의 짙은 흔적이 나를 이끌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렇게나 많은 개들이 있었구나. 이 개들도 신나게 달리면서 여기에 흔적을 남겼을까? 매일 오늘처럼 달릴 수 있다면 너무도 행복할 텐데. 개들과 함께 달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나는 누렁이고 또또야. 할머니랑 아저씨랑 여자랑 같이 지내. 너는 누구야?’ 하고 인사를 건넬 텐데.
한참 나무 밑줄기의 냄새를 맡다가 고기 굽는 냄새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길 건너편이었다. 여자와 산책하면서 맡았던 고깃집의 연기에서 났던 냄새랑 비슷했다. 문을 열어 둔 가게 너머로 사람들이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못 먹어 봤는데. 배가 고팠다. 달리는 황홀감에 잊고 있었던 허기가 빠르게 몰려왔다. 내가 다가가면 사람들이 뭔가 먹을 걸 주지 않을까? 혹시 여자가 저기에 있지 않을까? ‘어서 와, 또또야’ 하며 나를 반기지 않을까? 길 건너로 힘차게 달음질을 쳐본다. 하나, 둘-
끼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른쪽 옆구리에서부터 끔찍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늘로 떠오른 순간에 붉은 네온사인 간판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리는 나를 보고 여자가 와줬어. 곧이어 온몸이 차가운 바닥에 꽂히듯 떨어졌다. 쿵. 힘찬 숨을 내쉬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뾰족한 고통이었다. 축축한 피에 털이 젖어가는 비린내가 났다.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여기까지 달려온 나를 보면 잘했다고 예뻐해 주겠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긁어주겠지. 넘어진 나를 일으켜 안아주면서 우리 또또, 이제 같이 달릴까 하고 말을 걸어주겠지. 이제 어디로..
*사진출처 : 머니투데이 "'1m 목줄'에 묶여… 시골 개의 하루를 보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