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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01. 2017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대한 단상

오후 4시에 커피잔에 소주를 따라마시고 싶게 만드는 주정뱅이 양산용 소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문장이 있다. 누구의 입에서 나와도 나로선 쉽사리 거절하기 힘든 마법같은 문장. 상황의 맥락은 다소 다르다. 하나는 "산책하러 갈래?" 나머지 하나는 "술 한잔 하러 갈래?"


술을 잘 마시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유전적 기질 덕분인지, 나는 여자 치고는 왠만큼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 달달한 맛을 좋아하기에 좋아하는 술은 모스카토로 만든 와인이나 모히토, 쿠바 리브레같은 칵테일, 진저엘과 위스키를 잘 섞은 진한 하이볼, 상큼하고 달큰한 파인애플 향기를 풍기는 이과두주류의 술이랄까. 소주는 여전히 마시기 힘들다, 도수를 떠나 내겐 너무나 노골적인 쓴 맛을 보여주는 술이기에.

저렴하고 맛있는 브라운브라더스의 모스카토 로제
양꼬치엔 칭따오도 좋지만 향기로운 중국술이 참 잘어울린다


알콜중독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주변 지인들에게는 맛있는 요리에 술 곁들이는 것을 즐기는 애주가로, 회사 사람들에게는 회식 자리에서 흑장미를 부담없이 맡길 수 있는 그런 술 쎈 여자로 포지셔닝 되고 있다는 말씀.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휴일 오후 3시쯤 마시는 달콤한 과일 향기를 간직한 와인이나 쌉싸름한 초콜릿 풍미로 기분좋은 미소를 짓게 하는 IPA를 한 모금하고, 알딸딸한 정신으로 말간 오후 햇살을 맞이하는 게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책읽으며 술한잔, 정말 좋다!
감튀에 맥주 조합은 불금에 으뜸!
소박한 꼬치요리엔 하이볼진저엘

그렇게 30년 인생을 살아오던 차에. 대학시절 도원결의로 뭉쳐 10년이 넘게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 친구로부터 권여선 소설집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워낙에 책을 가까이하는 친구인지라, 책선물이 낯설지 않은 사람이지만 이거 책 제목이 '안녕 주정뱅이'다. 뭔가 평소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차마 무서워 입밖에 내지 못한 느낌이 폴폴 나지 않는가. (책선물을 준 J는 평소에도 사려깊은 선비와 같은 성품으로, 주변 친구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한다.)


그 날도 일요일 오후 6시 무렵,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만 드링크로 생맥주를 한 잔 주문해 마시고 있던 차 건내 받은 책이니, 내심 뜨끔한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일터. (J

와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 K는 둘 다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고운 용모의 비법일 수도.)

잘 읽어보겠노라 감사표시 하고 에코백속에 들어간 이 소설집에 괜시리 눈만 한 번 흘리고 말았다.

제목이 수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모처럼 서늘한 바람이 날리고 하늘이 잔뜩 흐린 어느 휴일 날, 여유롭게 카페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펴 들었다. 일요일이라 옆자리에는 학생들이 재잘재잘 성경공부를 하며 주님의 말씀을 읊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이 주정뱅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술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있자니 다소 뻘쭘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어떤가, 나는 당당한 주정뱅이인걸.



술과 관련한 우리 주변의 조금 서글픈 이야기들


안녕 주정뱅이는 7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모든 이야기는 크든 작든 '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있다. 가난한 삶이 남자를 죽여가고, 그 남자의 고통을 바라보며 여자는 알코올에 의존하다 조금씩 미쳐간다든지. 이별여행을 떠나는 커플과 거기에 낀 한 친구가 여행지에서 술을 마신다든지.

내가 술을 마시고 나서 생긴 에피소드를 실어도 어색할 것 같지 않은, 소설이지만 조금은 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펼친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풍요와는 거리가 먼, 정서적 결핍이나 경제적 궁핍함 속에서 술로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여운을 남기면서 생각을 하게 하지만, 골치아프게는 하지 않는, 딱 그정도 분량의 영리한 글들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나서는 아 이 책 재밌네, 맥주한잔 해야지하는 기분이 든다기 보단,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씁쓸한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이나 위스키 온더락이 땡기는.

이 책을 둘러싼 공기는 상큼하게 탄산이 터지는 들뜬 색깔이 아니다. 삶과 술에 대해서 좀 더 진중하게, 습기를 머금고 침잠한 공기 속에서 곱씹어 봐야 어울릴 법한 글이다. 다만 이 술에 절은 인물들이 혐오스럽다기 보단,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된다는 것. 그건 권여선 작가가 이야기들에 걸어놓은 마법과 같다.



하나같이 슬프지만 조화로운 인물들


안녕 주정뱅이에는 여러 군소 인물들이 등장한다. 남동생과 가족때문에 평생 번 돈을 남동생 뒷바라지에 쏟아붓는 기구한 생을 살다, 철저히 고립되어 살아가다 생을 떠나는 선택을 하는 이가 있고. 술 속에서 환상을 보며 스스로의 나르시시즘 속에 잠식되어 가는 이가 있다. 고교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술을 들이부으며 신나게 놀지만, 깨고나서 느끼는 그 작위적인 관계에 환멸을 느끼는 이도 있다.  

참으로 다양한 인물상이 등장하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그들은 기구하다. 삶 속에 웃음이 있지만, 그것을 밝은 햇살같은 웃음이라기 보다는 계속되는 절망속에서 슬며시 삐져나오는 실소에 가깝다.

이야기 속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잘 엮었다. 한 사람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여러 인물들이 함께 분위기를 자아내서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다. 아주 인상 깊었던 캐릭터를 꼬집기는 힘들지만, 모두가 다 기억속에 조금씩 남는, 캐릭터들의 팀웍이 멋진 단편집이랄까.

주정뱅이, 비극, 고통을 조합하니 롯데팬인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비극적임에도, 참으로 고운 문장들


나는 최근에 여행기나 기사들을 많이 읽어서, 그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확연히 그런 글의 문장들은 이해가 쉽고 군더더기가 없다. 소설은 이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안녕 주정뱅이를 읽으며 참 곱고 환상적인 표현들에 감탄하곤 했다. 정말로 내 눈앞에 그 인물이 보고 있는 풍경이, 그 생각이 함께 펼쳐지듯. 진절머리 나는 낡은 인생이지만 예뻤다. 이것은 철저히 작가가 가진 힘이다. 읽으면서 특별히 좋았던, 주인공이 차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에 대한 묘사를 인용한다.

- 시야가 탁 트인 바다쪽은 벨트처럼 얇게 깔린 짙푸른 수평선과 연푸른 거품의 구름층과 차고 흰 솜빛 하늘이 세겹의 비단이불처럼 횡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중략) 의식이 따뜻하게 개어진 촛농처럼 한없이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리는 와중에 돌연 내비게이션의 안내음이 날카롭게 울려 훈의 비현실적인 몽환 상태를 산산이 박살냈다.



이야기들을 다 읽고, 작가의 말 부분까지 꼼꼼히 살펴보고나서는 권여선 작가와 술 한 잔 하고 싶어졌다. 주정뱅이라 하기엔 좀 가벼운 것 같으니, 나 자신을 애주가라고 소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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