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에 커피잔에 소주를 따라마시고 싶게 만드는 주정뱅이 양산용 소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문장이 있다. 누구의 입에서 나와도 나로선 쉽사리 거절하기 힘든 마법같은 문장. 상황의 맥락은 다소 다르다. 하나는 "산책하러 갈래?" 나머지 하나는 "술 한잔 하러 갈래?"
술을 잘 마시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유전적 기질 덕분인지, 나는 여자 치고는 왠만큼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 달달한 맛을 좋아하기에 좋아하는 술은 모스카토로 만든 와인이나 모히토, 쿠바 리브레같은 칵테일, 진저엘과 위스키를 잘 섞은 진한 하이볼, 상큼하고 달큰한 파인애플 향기를 풍기는 이과두주류의 술이랄까. 소주는 여전히 마시기 힘들다, 도수를 떠나 내겐 너무나 노골적인 쓴 맛을 보여주는 술이기에.
알콜중독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주변 지인들에게는 맛있는 요리에 술 곁들이는 것을 즐기는 애주가로, 회사 사람들에게는 회식 자리에서 흑장미를 부담없이 맡길 수 있는 그런 술 쎈 여자로 포지셔닝 되고 있다는 말씀.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휴일 오후 3시쯤 마시는 달콤한 과일 향기를 간직한 와인이나 쌉싸름한 초콜릿 풍미로 기분좋은 미소를 짓게 하는 IPA를 한 모금하고, 알딸딸한 정신으로 말간 오후 햇살을 맞이하는 게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그렇게 30년 인생을 살아오던 차에. 대학시절 도원결의로 뭉쳐 10년이 넘게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 친구로부터 권여선 소설집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워낙에 책을 가까이하는 친구인지라, 책선물이 낯설지 않은 사람이지만 이거 책 제목이 '안녕 주정뱅이'다. 뭔가 평소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차마 무서워 입밖에 내지 못한 느낌이 폴폴 나지 않는가. (책선물을 준 J는 평소에도 사려깊은 선비와 같은 성품으로, 주변 친구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한다.)
그 날도 일요일 오후 6시 무렵,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만 드링크로 생맥주를 한 잔 주문해 마시고 있던 차 건내 받은 책이니, 내심 뜨끔한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일터. (J
와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 K는 둘 다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고운 용모의 비법일 수도.)
잘 읽어보겠노라 감사표시 하고 에코백속에 들어간 이 소설집에 괜시리 눈만 한 번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모처럼 서늘한 바람이 날리고 하늘이 잔뜩 흐린 어느 휴일 날, 여유롭게 카페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펴 들었다. 일요일이라 옆자리에는 학생들이 재잘재잘 성경공부를 하며 주님의 말씀을 읊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이 주정뱅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술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있자니 다소 뻘쭘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어떤가, 나는 당당한 주정뱅이인걸.
안녕 주정뱅이는 7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모든 이야기는 크든 작든 '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있다. 가난한 삶이 남자를 죽여가고, 그 남자의 고통을 바라보며 여자는 알코올에 의존하다 조금씩 미쳐간다든지. 이별여행을 떠나는 커플과 거기에 낀 한 친구가 여행지에서 술을 마신다든지.
내가 술을 마시고 나서 생긴 에피소드를 실어도 어색할 것 같지 않은, 소설이지만 조금은 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펼친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풍요와는 거리가 먼, 정서적 결핍이나 경제적 궁핍함 속에서 술로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여운을 남기면서 생각을 하게 하지만, 골치아프게는 하지 않는, 딱 그정도 분량의 영리한 글들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나서는 아 이 책 재밌네, 맥주한잔 해야지하는 기분이 든다기 보단,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씁쓸한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이나 위스키 온더락이 땡기는.
이 책을 둘러싼 공기는 상큼하게 탄산이 터지는 들뜬 색깔이 아니다. 삶과 술에 대해서 좀 더 진중하게, 습기를 머금고 침잠한 공기 속에서 곱씹어 봐야 어울릴 법한 글이다. 다만 이 술에 절은 인물들이 혐오스럽다기 보단,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된다는 것. 그건 권여선 작가가 이야기들에 걸어놓은 마법과 같다.
안녕 주정뱅이에는 여러 군소 인물들이 등장한다. 남동생과 가족때문에 평생 번 돈을 남동생 뒷바라지에 쏟아붓는 기구한 생을 살다, 철저히 고립되어 살아가다 생을 떠나는 선택을 하는 이가 있고. 술 속에서 환상을 보며 스스로의 나르시시즘 속에 잠식되어 가는 이가 있다. 고교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술을 들이부으며 신나게 놀지만, 깨고나서 느끼는 그 작위적인 관계에 환멸을 느끼는 이도 있다.
참으로 다양한 인물상이 등장하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그들은 기구하다. 삶 속에 웃음이 있지만, 그것을 밝은 햇살같은 웃음이라기 보다는 계속되는 절망속에서 슬며시 삐져나오는 실소에 가깝다.
이야기 속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잘 엮었다. 한 사람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여러 인물들이 함께 분위기를 자아내서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다. 아주 인상 깊었던 캐릭터를 꼬집기는 힘들지만, 모두가 다 기억속에 조금씩 남는, 캐릭터들의 팀웍이 멋진 단편집이랄까.
나는 최근에 여행기나 기사들을 많이 읽어서, 그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확연히 그런 글의 문장들은 이해가 쉽고 군더더기가 없다. 소설은 이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안녕 주정뱅이를 읽으며 참 곱고 환상적인 표현들에 감탄하곤 했다. 정말로 내 눈앞에 그 인물이 보고 있는 풍경이, 그 생각이 함께 펼쳐지듯. 진절머리 나는 낡은 인생이지만 예뻤다. 이것은 철저히 작가가 가진 힘이다. 읽으면서 특별히 좋았던, 주인공이 차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에 대한 묘사를 인용한다.
- 시야가 탁 트인 바다쪽은 벨트처럼 얇게 깔린 짙푸른 수평선과 연푸른 거품의 구름층과 차고 흰 솜빛 하늘이 세겹의 비단이불처럼 횡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중략) 의식이 따뜻하게 개어진 촛농처럼 한없이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리는 와중에 돌연 내비게이션의 안내음이 날카롭게 울려 훈의 비현실적인 몽환 상태를 산산이 박살냈다.
이야기들을 다 읽고, 작가의 말 부분까지 꼼꼼히 살펴보고나서는 권여선 작가와 술 한 잔 하고 싶어졌다. 주정뱅이라 하기엔 좀 가벼운 것 같으니, 나 자신을 애주가라고 소개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