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 귀촌생활의 단편
요즘 나는 꼬끼오하는 수탉 소리에 잠을 깬다. 우리 뒷집에서 키우는 닭이 우는 소리는 소음 없는 시골의 맑은 공기 덕에 더 멀리 뻗어나간다. 커튼 틈 사이로 강하게 스미는 아침 햇살과 새들이 지저귀는 경쾌한 소리에 눈이 절로 떠진다. 휴대폰 알람이 필요가 없을 지경이다. 오토바이 소리나 취객들의 소음으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서울에서의 밤과 달리, 시골의 밤은 소리 하나 없이 깜깜하다. 조금 귀를 기울이면 별이 반짝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덕분에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스트레스로 잠을 설치고, 자고 일어나도 피곤했던 서울의 수면과는 질이 다르다.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마당으로 나가면 풀냄새와 흙냄새가 코 끝에 머문다. 우리 마을은 마당에 나무를 심은 집들이 많은데, 우리 집도 잔디마당에 석류나무며, 사과나무, 대추나무, 무화과나무 등을 심어 요즘은 거의 매일 무화과를 배불리 먹고 있고 대추도 잘 따다가 곱게 말리고 있다. 텃밭 한 구석에는 얼마 전 시들해져 버린 고추를 뽑고 상추를 심었고, 봄에 심어둔 가지는 잘 자라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가지를 따다가 나물을 해 먹게 되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한 서울에 환호하며 도시 생활을 찬양했던 나는, 이제 저녁 7시가 넘어가면 어둑해지는 조용한 마을 길에서 강아지 뿌꾸를 산책시키고 10시가 조금 넘으면 졸려하며 잠자리에 든다. 아침엔 일찍 출근하신 엄마가 갈아둔 토마토 주스를 마시고 저녁식사는 늘 큰 상에 준비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함께 먹는다. 도시를 좋아하면서 밤이나 주말이면 온갖 사교 모임에 나서고, 술이며 자극적인 음식들을 찾아 헤매던 나는 조금씩 나를 갉아먹었고, 이제는 조용한 부모님 집에서 거짓 없는 노동을 하고 생명력 넘치는 자연을 보면서 다시 조금씩 나 자신을 충전해 가고 있다.
도시 사람이 보기에 시골에서의 삶은 너무도 단조로울 수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계절마다 제철을 맞이하는 작물이 다른지라 작은 텃밭도 계획적으로 작물을 심었다 걷었다 해야 하고, 잔디는 여름이면 금세 잡초와 함께 자라 버리기 때문에 2주에 한 번은 깎아주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리거나 타이밍을 놓치면 깻잎은 시들시들해지고, 대추도 벌레 먹어버린다. 마당 잔디는 정리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평일에 하기엔 어렵고 주말에 작업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비가 오면 못한다. 그렇게 일주, 이주가 지나가면 마당은 정글처럼 키 큰 잔디와 잡초가 어우러져 발 디디기도 어려워진다.
시골집이라면 단연코 잔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가족의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나는 잔디를 가꾸는 것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인 줄 몰랐다. 별도로 잔디 관리사를 두지 않는 이상은 이 넓디넓은 마당의 잔디를 가꾸는 것은 오롯이 우리 가족의 몫이다. 볕이 좋은 주말이면 나는 보쉬의 잔디 깎기를 열심히 밀고, 아빠는 예초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비장한 잔디 관리에 나선다. 우리 집 잔디 깎기는 전원을 연결해서 카트처럼 밀면 아래쪽에 칼날이 돌아가면서 일정한 높이로 잔디를 깎아내는 스타일인데, 직진하는 건 쉽지만 그 외 방향 전환은 쉽지 않다. 그래서 항상 동생과 한 조를 이뤄서 동생은 기다란 전기선이 꼬이지 않게 잡고 내가 잔디 깎기를 요리조리 돌려가면서 마당 잔디를 다듬는다. 나무 데크와 닿아있는 모서리나 마당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돌 주변은 잔디 깎기로 세심하게 자를 수가 없어서 아빠가 예초기로 자른다.
나도 한 번 예초기를 매고 해 본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무겁고 시끄럽고 진동이 커서 무서웠던 터라 이후로 나는 계속 보쉬 잔디 깎기 담당이다. 잘라낸 잔디가 쌓이면 잔디 깎기 뒷부분에서 흘러넘치기 때문에 중간중간 잔디 통을 비워줘야 한다. 그럴 때는 잔디를 모아다가 나무를 심어놓은 부분에 거름처럼 뿌려준다. 잔디도 모이면 꽤나 무겁기 때문에 이렇게 잔디 통을 비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마당 잔디를 다듬고 정리하는 것에 두 시간 가까이는 걸리는 것 같다. 그래도 잔디를 짧고 예쁘게 다듬고 그 위를 슬리퍼로 걸으면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풀냄새가 올라와서 기분이 좋다.
텃밭에는 주로 모종을 사다가 심는다. 한 줄에 열 개 남짓되는 모종을 서너 줄 사다가 밭에 심는데, 나도 상추, 배추 같은 작물들을 심는 것에 이제 익숙해졌다. 모종을 심기 전에는 이전에 밭에 심겨있던 작물을 뽑아내고 흙을 한번 뒤집어 줘야 한다. 갈고리로 싹 한번 흙을 골라준 뒤, 퇴비를 뿌려서 골고루 섞는다. 아무래도 퇴비가 어느 정도 들어가 줘야 모종들이 영양분을 더 많이 먹고 힘 있게 자라는 것 같다. 퇴비가 너무 독하면 오히려 모종이 죽을 수 있으므로 흙에 골고루 넓게 펴주어야 하는데 이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퇴비를 뿌려주고 하루 이틀 기다린 후 모종을 비슷한 간격으로 심어준다. 모종삽으로 위치를 잡고 모종을 하나씩 톡톡 떼어다가 얹은 뒤 잘 뿌리내릴 수 있도록 흙을 단단히 덮어준다. 그리고 그 모종 주위로 동그랗게 흙을 파준다. 물을 뿌렸을 때 바로 다른 데로 새지 않고 모종 근처에 고여서 오래 스며들도록 하기 위함이다.
처음에는 시들해 보이는 작은 모종이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자리를 잡고 시골 햇살과 맑은 공기를 먹으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흙을 조금 파보면 온갖 벌레며 지렁이도 보이는데, 도시에 있었으면 기겁하고 놀랐을 풍경도 이제 땅의 생명력으로 무던하게 받아들여진다.
가끔 엄마가 뭔가를 만들어 달라고 하실 때가 있다. 평소 과일 껍질 같은 것들은 모아두었다가 마당 나무들 밑에 거름처럼 뿌리는데, 매번 여기저기 버리기 번거로우니 거름통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이케아라도 가까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 시골에서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다. 대신 우리 아빠는 손재주가 좋으신 편이고 집에도 웬만한 공구들이 다 있기 때문에 금방 만들어내시는 편이다. 이번에도 엄마의 요청이 있자마자 아빠는 간단히 설계도를 그리시더니 나무를 고르고 창고에서 전기톱과 핸드드릴을 꺼내셨다.
이번에는 나도 뭐 좀 해볼 거 없을까 싶어 얼쩡대고 있었더니 내겐 전동 핸드드릴이 주어졌다. 거름통을 사각 뜀틀처럼 만들기로 하고 토대가 되는 목재는 아빠가 전기톱으로 자르셨다. 네 면을 이어 붙이기 위해 전기드릴을 이용해 큼지막한 못을 박았다. 못도 목재에 잘 박히는 전용 못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처음에는 못의 방향과 드릴의 방향을 잘 못 맞춰서 드릴이 헛돌았는데, 옆에서 보고 못과 드릴의 각도를 맞춰서 해보니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집중하느라 말은 점점 없어지고 휘잉 하는 못 박히는 소리만 나니 여기가 가정집인지 공장인지 모를 지경이다. 부녀관계라기보다는 장인과 수련생 같은 느낌이 난달까. 네 모서리 부분에 못을 박아 연결하고 어느 정도 형태가 만들어진 후, 거름 발효가 잘되게 만들기 위해 각 면에 드릴로 여기저기 작은 구멍들을 뚫었다. 핸드메이드 목재 거름통이 이렇게 뚝딱 하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내겐 핸드드릴 사용 능력치가 생겼다! 부모님 댁에 내려와서는 토치로 불 붙이기, 장작 패기, 못 박기 등 생존에 필요한 소소한 기술들을 익히게 되었다. 이 또한 도시에서는 쉽사리 배우지 못하는 것들이 아닐까.
시골에서의 노동은 서울 회사에서의 노동보다 정직하고 고되다. 컴퓨터 화면을 보며 메일을 쓰고, 회의에 참석하고, 기획서를 만드는 것도 생산성 있는 일이겠지만, 다음 계절을 생각하며 몸을 쓰는 것 또한 귀한 노동이다. 누렇게 뜨는 깻잎이나 말라가는 고춧잎이 걱정돼 앞집 뒷집 어르신들의 조언을 들어가면서 텃밭을 다듬는 것도 좋고, 마을을 어슬렁 거리며 산책해도 독한 매연 맡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 좋다. 가끔 뒷집 할아버지네 손주들이 놀러 오는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끼리 까르르 뛰어놀다 나를 발견하면 '안녕하세요'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가며 큰 소리로 인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의 어린 시절 노스탤지어를 자극해 흐뭇하게 만든다. 서울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물론 나는 힘도 능력도 되지 않기 때문에 시골에 자리 잡고 농사짓는 삶을 살지는 못하겠지만, 이렇게 나의 도피처에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초록빛 마당의 넘치는 생명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마음에 조금의 위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