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가을이란
'아- 오늘도 많이 떨어졌네'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한탄을 한다. 회사에서 이 말을 했다면 주식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사실 우리 집 대추나무 이야기다. 2년 전 마당에 대추나무 한 그루 심어놓은 것이 여름에 뿌려준 거름을 먹고 생각보다 잘 자라서 올해는 대추가 너무 많이 열렸다. 최근에는 태풍이 자주 와서 무르익어 가던 대추들이 거센 비바람에 후드득 떨어져 버렸다. 매일 틈날 때마다 보면서 조금씩 대추를 따기는 했지만, 연달아 온 태풍의 일격에 힘이 약해진 나무에서 하루가 다르게 몇십 개씩 떨어지는 대추가 아까워 온 가족이 주말에 대추를 수확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추나무 가시에 긁히지 않기 위해 긴 팔 티셔츠에 긴 바지, 장화, 한쪽 면이 코팅된 목장갑, 밀짚모자까지 장착! 꽤나 찬바람이 부는 지금까지도 마당에 나가면 귓가에 잉잉대는 모기떼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중무장은 필수다. 대추는 고운 연둣빛에서 갈색으로 변해가는 단계였다. 각자 대야며, 조그만 종이 상자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조심조심 대추를 땄다. 벌레 먹거나 새가 쪼아 먹은 대추는 버린다. 너무 익어서 만졌을 때 물컹거리는 대추도 탈락. 잘 익은 대추는 손만 살짝 대도 톡 하고 떨어지는데, 가지 한 송이에 붙어 달린 대추들이 우르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대야를 미리 대추 송이 밑에 받쳐 들고 살짝 따야 한다. 동글동글 윤이 나게 잘 익은 대추 하나에 눈이 멀어 섣불리 건드렸다가, 주변 대추들이 같이 우수수 떨어진 바람에 쭈그리고 앉아 땅에 떨어진 대추를 서글프게 줍고 있으니 새가 비웃듯이 깍깍하고 울며 지나갔다.
대추를 담은 대야가 점점 무거워지고, 고개를 계속 빳빳하게 들고 잘 익은 대추를 탐색하고 있자니 목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생명력 강한 대추나무는 키도 훌쩍 커버려서 안쪽에 높이 달린 대추를 따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이 무슨 육체노동인가 싶다가도, 지금 제 때 대추를 수확해주지 않으면 낙과 대추에 우리 가족 마음이 아프고 대추나무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기에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올 때쯤 노동은 마무리되었다.
각자 딴 대추를 잘 모아 식초를 뿌린 물에 담가서 소독한다. 슬쩍 하나를 빼돌려 입에 물어보니 아삭-하면서 단맛이 입안에 감돈다. 마당 데크 위에 잘 펼쳐서 말려두면 꽤 오랫동안 차로 끓여 먹거나 과자처럼 먹을 수 있다. 삼계탕 끓일 때 넣거나 육수 낼 때 한두 개 넣어두면 말린 대추 특유의 달큼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밭을 한번 갈면서 고구마도 수확했다. 고구마는 여섯 뿌리를 심었을 뿐인데, 줄기가 무럭무럭 자라 우리 집 텃밭에서 존재감이 가장 확실한 작물이 되었다. 몇 번이고 줄기를 거둔 뒤 흙을 잘 씻어내고 단단한 껍질을 벗기고 삶아 고구마 줄기 나물을 해 먹었다. 온 가족이 마당이나 거실에 둘러앉아 비닐장갑을 끼고 누가 고구마 줄기를 가장 잘, 많이 까는지 겨루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는 손이 섬세하지 못한 편이라 긴 줄기 하나를 톡 소리 나게 둘로 쪼개서 거친 겉껍질만 벗겨내는 게 어려워 초반에는 꽤나 애먹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껍질을 벗겨낸다. 불과 몇 주전까지만 해도 빠른 속도로 노트북 타자를 쳐내려 가던 손은 이제 비닐장갑을 끼고서 바쁘게 고구마 줄기 다듬는 손으로 변했다.
고구마를 뽑고 그 자리에 마늘을 심기로 했다. 무성한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고 호미를 들고서 밭을 파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태풍이 비를 뿌린 터라 땅이 제법 말랑해져 호미질이 한결 수월했다. 얼마 파지도 않았는데 주먹만 한 고구마들이 보였다. 서로 얽혀 자라 한 몸처럼 보이는 고구마 형제와 엄지손가락 두 개 크기 만한 아기 고구마들도 파냈다. 얼기설기 얽혀 있는 여러 개의 고구마들을 캐내면 절로 '어 이거 대박이다' 하고 외치게 된다. 한날 한 시에 심어도 이렇게 자란 모습이 다른 걸 보면 땅에 비료를 얼마나 뿌렸는지, 돌을 얼마나 잘 골라주었는지, 햇살을 얼마나 받았는지, 비가 얼마나 고여있었는지 등 세부적인 환경들이 그 땅의 생명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공을 들여 보살피면 땅은 더 실한 열매들을 내놓겠지. 대단히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열심히 자라 준 고구마에게 고마운 생각과 함께 땅의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느껴졌다.
이 날 수확한 고구마는 다음날 아침 잘 쪄서 먹었다. 따끈하고 달콤한 고구마는 서늘해지기 시작한 시골에서 최고의 간식이다. 우리 뿌꾸도 제일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가 고구마라 큼지막한 고구마 하나를 꼬리를 흔들어 가며 신나게 잘 먹었다.
우리 집 마당 입구 쪽에는 여주도 있는데, 잘 익은 여주는 보이는 대로 두어 개씩 따다가 잘 씻어서 오이 썰듯이 썰어준다. 그대로 햇빛에 말려도 되지만 우리 집은 건조기가 있어 거기 넣어 두고 하루 이틀 정도 말린다. 여주를 처음 보고서 뭐 이렇게 생긴 채소가 있나 싶었는데 썰면서는 그 냄새도 씁쓸해서 영 별로였다. 그래도 말린 여주를 차로 끓여 마시면 당뇨 등에 좋다고 하니 매번 말려서 통에 잘 넣어 보관하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깨끗이 손질해서 말린 식물들이 꽤나 많은데 눈에 좋다는 메리골드와 수확이 너무 좋아 여러 번 나물을 해먹고도 남았던 가지도 말렸다. 며칠 전에는 페퍼민트, 스피아민트, 애플민트 이렇게 민트 삼총사까지 등장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시골 마당에는 뭔가 말려놓고 있어야 그 특유의 정취가 나는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시골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마당에 나는 풀들을 보고 이걸 먹을 수 있는가, 말려서도 먹을 수 있는가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가을은 역시 수확의 계절이다. 학업이나 회사 업무에 있어서도 올 한 해 열심히 해 온 것에 대해 늦가을 즈음에 성과를 평가하듯,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도 가을이 되면 봄, 여름 동안 묵묵히 손질해온 논이며 밭에서 빽빽이 들어선 알찬 벼나 먹음직스러운 과실들로 보상받는다. 보살핀 대로 거두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시골에서 깨닫는다. 물론, 때때로 예상치 못한 강풍이나 폭우가 몰아칠 때면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나무를 동여매거나 화분을 옮겨놓으며 마음 졸이는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수수 떨어진 낙과를 보면 허망하다. 옛날 같았으면 태풍이나 병충해 피해를 입은 농작물을 보면 아깝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제는 저 작물들을 애지중지 가꾼 이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공감되면서 조금은 슬퍼진다.
마을 다른 어르신들처럼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과일나무 몇 그루와 텃밭을 가꾸며 매년 조금씩 늘어나는 수확의 기쁨을 맛본다. 그와 동시에 다가오는 추운 겨울을 맞이하는 내 마음이 조금은 더 든든해진다. 작은 텃밭이라도 가을에는 특히나 더 일손이 필요하다. 항상 가을이 되면 시골집에 내려와 수확하는 일을 거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