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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Oct 30. 2019

서울로 돌아가며

 시골에 내려와 3개월을 머물렀다. 속 편히 늘어져 자고 뿌꾸와 산책을 많이 하고 읽고 싶은 책들을 잔뜩 읽었다. 애정이 있던 브런치에 시골 살이와 뿌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즐거웠다. 서울에서는 주말에도 꼭 약속을 잡아 누군가를 만났고 혼자 있더라도 전시회를 가거나 이력서를 정리하거나, 외국어 공부 등 뭔가를 하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했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내가 좋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계속 손에 잡히는 성과들을 쫓아 살면서 나 자신에게 빡빡한 기준을 강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러서면 지는 것'이라는 공격적인 모토로 10년 넘게 서울살이를 하면서, 아파서 휴가를 얻어 쉰다는 것은 내게 패배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좀 쉬면서 몸과 마음을 다듬어야 할 때라고 생각해 도망치듯 내려온 시골에서의 나는 패잔병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가족이 일군 시골의 집은 지친 내게 잘 돌아왔다며 넉넉하게 한 품을 내어주었다.


 마음 한편에 '언제나 내 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힘을 준다. 살면서 오롯이 혼자 만의 힘으로 버텨내는 것은 정말 외로운 길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을 그대로 내어 보이고 힘든 부분을 토로하기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괴로울 때 가족과 오랜 친구가 있어 너무도 다행이었다. 내가 밝게 조잘대거나, 침울해있거나, 때론 말없이 멍해 있어도 그저 그런 내 상태를 받아들여주고, '그러면 안돼'라는 말을 쉽사리 하지 않았다. 가끔은 그런 관대한 마음들에 감사해서 왈칵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중이니까. 나만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무서운 고립감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사랑받고 있으며 떨어져 있어도 그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따뜻한 확신으로 조금씩 바뀌어갔다.


 시골이 주는 에너지는 은근하지만 힘이 있다. 좀처럼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 해가 뜨고 또 진다. 시골 사람들의 하루 일과도 비슷하다. 아침 부지런히 일어나 밭을 가꾸거나 일을 하고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산책을 한다. 요란한 행사나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법이 없다. 그 '아무 일도 없다'는 일정함, 예측하기 힘든 일로 인한 긴장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 안정을 주었고,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서 하게끔 동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공기와 나무의 색깔로 느끼고 지금도 내 존재는 잘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다.


 마당 한 구석 그늘에 걸터앉아 가만히 눈을 감아 본다.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으며  지나가고 맑게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귀 기울여 보면 사락사락 거리며 스치는 나뭇잎 소리와 함께 쌉싸래한 잔디 풀 향, 멀리서 밭을 태우는 듯한 희미하게 텁텁한 탄내가 마음속으로 섞여 들어온다. 뭔지도 모를 것에 쫓기는 듯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스윽- 후웁-'하는 나의 들 숨과 날 숨소리가 느껴진다. '어딘가의 누구'로서가 아니라, 온전하고 평화로운 나를 자각한다. 이런 걸 명상이라고 하는 걸까. 때 마침 자기를 좀 봐달라고 낑낑 거리는 뿌꾸의 앙탈에 눈을 뜬다. 한 손 가득 감기는 뿌꾸의 보드라운 털이 나를 안심시킨다. 간식 달라고, 같이 놀아달라고 몸을 부딪혀 오는 뿌꾸를 품에 가득 안아주면 어느새 얌전해진 뿌꾸의 온기와 심장 뛰는 소리에 치유받는 느낌이 든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참 길 줄 알았는데, 지나 보니 금방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명과 귀 먹먹함을 겪고 있고, 특별한 치료법은 없기 때문에 어쩌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걸 인정하게 되기까지 이만큼이 걸렸다. 이만큼의 시간과 가족들의 사랑과 뿌꾸의 재롱이 있었다. 귀가 불편해진 나 자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매운 것을 못 먹고 산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이것도 내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보듬고 살아가기로 했다. 회사로 복귀하고 서울에서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겠지만 무리해서 발랄하게 굴 생각은 없다. 이제는 글쓰기, 책 읽기, 유기견센터 봉사 같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더 많이 하고 때때로 다시 시골집에 돌아와 텃밭을 가꾸고 잔디를 자르고 열매를 수확하는 삶을 살면서 더 행복하게 지내려고 한다. 나를 이만큼이나 더 키워준 시골에 애정을 듬뿍 담아서. 시골의 관대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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