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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13. 2019

해적의 여행법

리스본 여행 에세이 #13. 알파마




“이곳에 오면 몇 번이나 길을 잃고 만다.”

도착 전부터 존 버거가 남긴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스마트폰의 배터리를 거듭 체크하고 세세한 곳까지 표시된 지도도 가방에 챙긴다. 이 정도면 됐다 싶었을 때 28번 전차가 도착한다. 그것에 올라타 어민의 도시, 알파마로 향한다.


“아뿔싸”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스마트폰의 GPS 기술은 알파마 골목의 세밀함을 이기지 못했다. 모든 골목이 그려진 지도를 펼쳐봤자 지금 내가 어딘지 모르니 의미가 없었다.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봐도 대부분 나와 같은 이방인이어서 그것 역시 도움이 안 된다. 운 좋게 현지인을 만나서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다. 설명을 따라 우회전을 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10m 안에도 몇 개의 골목이 갈리니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을 할 수가 없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다. 해적의 여행법을 배우는 것.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제일 먼저 눈이 자유를 즐긴다.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볼 필요도 없고, 지도를 떨어뜨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방 안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그저 가방은 어깨에, 스마트폰은 주머니에, 눈은 골목 곳곳을 바라보면 그만이다.


“이방인이라면 이곳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변하는 리스본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백 년 전 페소아의 말을 떠올린다. 그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알파마의 골목과 건물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리스본 대지진과 이후의 복구 과정에서 알파마는 그 시선을 피해갔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곳은 재건보다는 보존의 가치를 지키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처럼 헤매는 이방인들이 속출하지만 알파마의 유일한 지도가 머릿속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알파마의 지도. 해적의 눈으로 그것을 그려본다. 그러자 두 개의 길이 보인다. ‘산타 루시아 전망대’나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를 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오르막길.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의 집이나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산타 아폴로니아 역을 보고 싶은 이들을 위한 내리막길. 이 두 개의 길만 알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설령 복잡한 골목이 있다 해도 전망대를 보고 싶다면 조금이라도 위를 향한 길을 따라가면 되고, 반대라면 아래를 향하는 길을 걸으면 된다. 물론 그것이 목적지를 향한 가장 빠른 길은 아니다. 하지만 알파마는 목적지를 아는 해군을 위한 도시가 아닌, 목적지를 찾는 해적을 위한 도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골목을 돌고 또 돌아 오른다. 한 번은 남의 집 마당에 들어갔고, 또 한 번은 계단이 아닌 곳을 오르다 막다른 곳에 닿는다. 그럴 때면 다시 돌아 나오면 그만이다. 문제는 체력이다. 기약 없는 목적지를 향한 걸음은 불안감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불안감은 알파마에 부는 바닷바람처럼 건물의 회칠과 나의 체력을 깎아 내린다.

다행히 건물의 외벽에는 아줄레주라 불리는 타일이 붙어있다.

그 옛날, 알파마의 항구에는 아프리카에서 들어오는 배들이 정박했다. 대륙의 바닷바람까지 몰고 온 그들 덕에 알파마의 건물은 쉽게 부식했다. 이를 막기 위해 알파마 사람들은 타일을 덧댔다. 그것으로 부식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알파마 사람들은 곧 깨달았다. 너무 심심하다는 사실을.

건물 밖에서 하품을 멈추지 않던 알파마 사람들은 타일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의 주제는 다양했지만 대부분 그들의 눈에 담긴 풍경을 그렸다. 그렇게 파란색 그림, ‘아줄레주’가 타일에 담기자 알파마는 새로운 도시가 되었다.


다양한 아줄레주와 건물을 보는 눈요기로 잠시 체력을 회복한다. 물론 오후 내내 그것밖에 본지 못했지만, 그들이 타일에 남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리스본 곳곳을 거닌 기분이 든다.

“이제 그만 내려갈까?”

대성당도, 전망대도, 상 조르주 성도 보지 못했지만 그러면 어떠랴. 해적은 기대는 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는 법이다.



높은 알파마 지구에도 해는 저문다. 뜨겁게 달궈진 타일에 빛이 사라질 때쯤 28번 전차가 서는 곳을 향해 걸었다. 물론 그 길이 맞는지 확신은 없다. 다만 내리막길을 향해 걸을 뿐이다. 아래를 향하니 그늘이 점차 짙어진다.. 모험을 하느라 흘린 땀이 그늘 위로 증발하자 체온이 내려간다. 오랜만에 가방을 연다. 그리고 지도와 물병, 잡동사니 밑에 처박힌 바람막이를 찾는다. 그렇게 알파마에서 눈을 뗀다. 그 사이에도 관성이 붙은 다리는 움직인다. 겨우 바람막이를 찾아 꺼내 든다. 다시 시선은 알파마다. 눈 앞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벽과 골목, 건물과 푸른 타일도 없다. 대신 그곳엔 붉은 지붕과 그보다 붉은 금빛 바다가 있었다.


‘미라도루(miradouro)’

바다와 맞닿은 알파마는 해적을 거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해적의 여행법을 아는 이방인도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조금 짓궂은 편이라 보물을 꼭꼭 숨겨 놓는다. 예를 들어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멋진 미라도루 같은 황금을.


지붕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리스본 사람들은 그것을 미라도루라 부른다. “황금을 보다”라는 뜻의 미라도루. 그들 역시 찾고 있었다. 해적처럼. 세상에 숨어 있는 황금을 찾고 있던 것이다.

아프리카, 인도, 브라질… 전 세계를 항해한 포르투갈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한 황금을 훔쳐 왔다. 하지만 그것을 미라도루라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황금이라 말한 것은 알파마 골목을 모험하는 이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바로 이 전망뿐이었다.



알파마에서 지도와 스마트폰을 넣어두어도 괜찮은 이유.

이름 높은 전망대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

그것은 알파마의 장난기에 있다.

그리고 지금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름 없는 전망대에 있다.




글 | 최동민

제작 | Studio 1.9.8.4

메일 | groscalin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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