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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Sep 22. 2024

【소설】
놀러 오세요, 담담 놀이터에 #1.

준비운동

 1.

 '이게 얼마 만인지….' 택시 뒷좌석에 앉은 유연은 가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럴 때마다 유연의 얼굴엔 미소와 찡그림이 반복되었다. 마치 기쁨이와 슬픔이가 짝꿍처럼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은 듯 보였다.

 "아가씨, 보포리는 처음인가 봐요?"

 택시 기사는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유연이 택시에 오를 때부터 반가운 표정이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 누가 보면 유연을 멋진 파티에 초청한 사람처럼 보였다.

 "네? 보포리요?"

 유연은 택시 기사의 질문에 깜짝 놀라며 답했다. 유연이 가려는 것온 교월리였으니 놀랄만도 했다.

 "아니, 저는 교월... 리에 간다고 아까 말씀 드렸…?" 유연은 불안한 마음에 상체를 가운데로 기울였다. 그리고 기사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되물었다. 그러자 기사는 아까보다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보포리. 맞구먼.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네. 맞아요. 맞아. 보포리."

 유연은 머리 위로 물음표가 다섯 개쯤 생긴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각도가 심상치 않았는지 기사는 흘끔 뒤를 돌아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잘…. 알아듣지 못하신 것 같은데...요?"

 유연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기사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대체 무엇이 괜찮은지 알 수 없었다. 유연은 다시 물었다.

 "저희 교월리 가는 거 맞죠…?" "그럼요. 보포리."

 유연은 무슨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몰래카메라 채널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슬슬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앱으로 부른 택시니... 별일 없겠지 싶은 마음에 일단 몸을 뒤로 뺐다.

 "보포리에 가려는 아가씨 또래분들은 별로 없는데. 의외네요?"

 택시 기사의 말로 짐작해 본다면 기사는 보포리(교월리로 추정되는...)에 사는 주민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정확히 짚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유연은 다시 한번 물었다.

 "아저씨, 저 보포리가 아니라... 교월리... 맞죠?"

 "그래 보포리. 여기도 참 그래요. 다리만 생기면 금세 북적북적할 것 같았는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쉽나요? 세상일도 그렇잖아요. 철저히 계획을 세웠다 생각해도 막상 해보면 무슨 함정이 그리 많은지. 그냥 푹푹 빠져요, 푹푹. 아가씨는 그런 적 없어요?"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다 늘어놓을 기운은 아직 없었다. 비록 시작은 체 게바라의 그것처럼 야심과 에너지가 넘쳤고, 할아범에게도 그리 큰소리를 쳤지만, 막상 현관 앞에 서자 용기는 비에 맞은 솜사탕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유연은 잘 묶인 운동화 끈을 괜스레 다시 풀고 또 묶었다. 아주 천천히. 그렇게 하면 사라진 용기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발이 두 개임을 아쉬워해야 할까? 양쪽 신발 끈을 모두 다시 묶었음에도 용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맞아요…. 다리 하나 가지고 바뀌는 건 많지 않죠…." 유연은 한쪽 팔을 창문에 기댄 채, 턱을 괴고 혼잣말했다. 택시 기사는 귀가 밝았는지 그런 유연의 혼잣말에도 반응을 해주었다. 평소라면 그런 목소리가 다소 피곤하게 느껴졌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수다스러움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직 창밖의 바람이 차가워서일까. 유연은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저 먼바다의 반짝임을 담기 시작했다.


 2

 진구는 유연의 방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러고는 결심했다는 듯 노크를 했다.

 '똑똑똑-'

 "유연아, 들어가도 되겠니?"

 "할배, 다 했다니까 그러네. 좀만요!"

 귀찮아하는 유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구가 답했다.

 "알았다. 네가 정 그렇다면 안 들어가마." "…. 알았으면 눈도 좀 치워주시죠?"

 어느새 살짝 문을 연 진구는 몰래 유연의 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유연은 방문을 열어주었다.

 "오호호, 들켜버렸구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는 유연.

 "뭐가 또 들켜버렸구나야. 됐으니까 들어오시죠."

 "흠흠…. 내가 훔쳐보려고 그랬던 건 아니고, 선풍기 바람이 어찌나 센지, 문이 다 열렸지, 뭐냐? 기술의 발전이 어휴…. 무섭다. 유연아."

 "할배, 적당히 하시고요."

 유연은 외할아버지 진구를 그렇게 불렀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굳은 입버릇은 쉽게 고쳐지질 않았다. 진구 역시 유연이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유연아, 이 할배가 마지막으로 말하마. 아직은 여기서 할배, 할멈이랑 같이 지내는 게 어떠니?"

 진구는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할아버지…." 유연히 진구를 보며 말했다.

 "그래. 네 뜻이 완고하다는 거 잘 안다. 네 고집? 나만큼 그걸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뭐 사실 나도 쿨한 사람이야. 네가 그렇게 원하는데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질 생각도 없어. 바지라고 해봐야 그리 짧아서야 남사스러워서 붙잡을 수도 없겠지만 말이야."

 "할아버지…." 유연히 진구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래도 말이다. 유연아. 할배는 네가 거기 가는 게 싫어. 이건 진심이야. 그래도 정 네가 가고 싶다면 말릴 방법은 없겠지만 말이다." "…. 할아버지."

 "그래 방법이 없어…. 방법이..." 유연이 진구의 손을 낚아채며 말했다.

 "할배. 캐리어 풀어 해치면서 그런 얘기 하지 마시죠? 설득력 떨어져."

 유연은 캐리어에 싼 짐을 하나씩 꺼내놓는 진구를 말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호호, 들켜버렸구나."

 진구의 실없는 반응에 유연은 괜히 웃음이 났다. 진구는 뒷짐을 지고는 다시 문 쪽으로 향했다. 느릿한 속도가 나이 때문인지 서운함 때문인지, 혹은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 유연은 뒤에서 진구를 껴안았다. 진구는 유연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거기는 여기만큼 즐겁진 않을 거야. 그것만은 알고 가렴."

 진구의 말에 유연이 답했다.

 "알아. 거기도 여기만큼 즐겁게 만들려고 가는 거야."

 진구는 유연의 손을 몇 번 토닥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유연이 문을 나서는 진구를 부른다.

 "응?"

 "내놔. 내 핸드폰."

 진구는 유연에게 찡긋 윙크를 보낸다.

 "오호호, 들켜버렸구나."

 유연은 고개를 내젓는다. 졌다는 표시였다. 항상 그랬다. 유연과 진구의 싸움은 항상.

 두 사람 모두 이기고, 두 사람 모두 패배했다.


 3.

 "나무가 참 많네…." 택시는 어느새 깊은 길로 들어섰다. 좁은 2차선 길옆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가 가득했다. 가로수라고 말할 수 없는, 조금 넓은 숲길을 가로지르는 듯 했다.

 "그렇죠? 그게 이 마을의 자랑이라면 자랑이랄까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 이 나무들 모두 옮겼어야 해요. 아가씨가 보기에도 도시에 있는 나무들이랑은 모양이 좀 다르죠? 그게 다 있는 그대로 놔둬서 그런 거거든. 군청에서는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길을 넓혀야 한다고 했는데, 주민들이 모두 반대했지. 그리 급하면 하루 전에 출발하면 될 일이라면서 말이야. 군청 사람들이 얼마나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관광객들 못 찾아온다. 마을 활성화는 꿈도 못 꾼다. 뭐 그러면서 말이에요. 말이야 바른말이지 어디 마을에 사는 게 우리뿐이냐고. 저 치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여기서 살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생명이 오가는 일도 아닌데 생명을 막 자르고 그러겠냐고. 안 그래요?"

 유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혼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생명이 걸린 일도 아닌데 나무를 베고 그걸로 무언가를 만들고... 유연이 하는 일이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말이에요. 보포리는 나무의 허락을 받아야 지날 수 있는 곳이에요. 그게 이 마을의 유일한 법이자 통행증 같은 거지."

 택시 기사의 말에 유연이 묻는다.

 "나무의 허락이요?"

 기사는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듯, 속도를 조금 높일 뿐이었다. 택시는 어느새 완만한 커브를 조금 오래 돌았다. 그러자 서 있는 나무의 자리가 끝나고, 물의 자리가 시작되었다. 바다였다. 깊은 물길 위를 지키는 것은 나무로 만든 다리였다. 노르웨이처럼 나무가 많은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다리였다. 기사는 택시의 속도를 낮추더니 다리 앞에서 멈추었다.

 "왜 멈추시는 거예요?"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나무의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어서 눈 감고 빌어요. 잘 부탁한다고 말이에요."

 "에...?" 당황한 유연과 달리 기사는 어느새 양손을 마주 잡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목소리에 없던 용기가 생긴 것일까. 유연도 '짝' 소리가 나게 마주치고는 외쳤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기사의 양손이 핸들로 향했다.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속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속도에 맞춰주려는 것일까. 해를 가리던 옅은 구름이 자리를 피해주면서 바닷물에 빛이 비쳤다. 윤슬이 파도처럼 일었다. 기분 좋은 환영 인사였다. 유연은 창을 최대한 내리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기분 최고! 들어서기 전부터 이 동네와 사랑에 빠지는 듯했다.

 "아가씨. 고개 넣어요. 위험한 행동은 허락해 드리지 않아요."

 "네..." 멋쩍어진 유연이 고개를 집어넣고 사과한다. 기사는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다.

 "아가씨만 그런 건 아니에요. 여기 처음 오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다 그러니까. 그래서 말인데. 제가 이런 손님이 많다고 마이 와이프에게 말했거든요? 그리고 최상의 서비스를 위해 오픈카로 바꿔야겠다. 얼마나 주장했는지 몰라요. 생각해 봐요. 이렇게 기분 좋을 때 뚜껑 딱 열고, 소리 한 번 지르는 거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유연은 그런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본다. 기분이 안 좋을 리 없었다.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인데요?"

 기사는 금세 울상이 되어 말한다.

 "그런데 안된대요. 마이 와이프가."

 "왜요?" "... 택시 표시등 달 데가 없다고."

 맞네.

 유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리는 항상 가까운 데 있었다.

 "아무튼 이제 들어왔습니다. 어쩐 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잘 오셨어요. 웰컴 투 보포리!"

 기사의 흥겨운 목소리에 유연은 가장 편한 자세로 몸을 기대앉는다. 입에는 어느새 미소가 올랐고, 열어둔 창문으로는 나무와 바다의 향이 실린 바람이 유연의 머리카락과 귀, 허리와 다리 사이를 돌아 나갔다.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세상 좋은 느낌. 이 느낌 때문이었을까? 유연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을 잠시 잡아둔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답을 따라갔다. 그 길에 깔린 것은 윤슬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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