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이야기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삶에도 기존과는 아주 다른 <가보지 못한 길>이 앞에 놓여있었다.
2월 중순의 추위는 여전히 깊었고 그 추위를 껴안고 직장생활을 내려놓았다.
오래동안 나를 품고 있었던 하나의 세계가 나를 남기고 꿈처럼 사라졌다.
그 세계가 사라져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는 떠있었다.
은퇴를 고려해서 집 본채에 딸린 작은 창고에 미리 책상과 의자도 갖추어 놓았다.
읽기를 미뤄두었던 책들도 여러권 갖다 놓았다.
창고 문은 일찌감치 유리문으로 교체해서 의자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나는 그곳을 ‘아빠 카페’라고 불렀고, 둘째딸은 ‘아빠 작업실’이라고 불렀다.
아내는 그곳을 ‘아빠 사무실’이라고 불렀다.
나는 쉬기를 원했고, 둘째 딸은 내가 한때 즐겨했던 목공예를 연상한 듯하다.
아내는 ‘아빠 사무실’로 명명하면서 평소와는 달리 그 근거에 대한 공개적인 해설을 하지 않았으므로 의도는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경제적인 소득 창출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암시일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평일에는 아침 식사 후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손목시계를 차고 그곳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다. 나에게는 카페이기 때문이다.
반평생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평일의 '홀로 있음'이 어색하고 낯선 느낌이 들었지만 마음 한쪽에선
이제는 일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옅은 희열이 조심스레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보지 못한 길>을 가야 하는 마음은 그리 썩 편치는 않았다.
아내는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불안한 감정을 함축적 문구로<가보지 못한 길>로 표현하면서
자신만의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곤 했다.
아내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보지 못한 길>이 우리 두 사람 앞에 번듯이 놓여 있음을 강조했다.
나의 현실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
어떤 때는 아내의 분위기에 덩달아서 <가본 길>은 끝이 났고 이제는 <가보지 못한 길>이 생명력을 갖고
코 앞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지금껏 가보지 못한 그 길을 기꺼이 가야만 했다.
그 길 위에서 풍요를 만났다.
화창한 봄날, 마당 울타리 밑에 채송화가 만발한 날이었다.
창고 카페 문을 통해 장군이가 점심밥을 먹으러 오는 것이 보였다.
<가보지 못한 길>을 가기 시작하면서 장군이 식사 당번은 자연스레 나의 몫으로 넘어왔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익숙한 동작으로 사료 봉지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카페는 좁은 공간에 그늘져 있었지만, 문을 열고 단 한 발자국만 나가면 바깥이었고,
그 바깥은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 가득한 무한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 한계 없는 공간을 좋아했다.
<가본 길>에서 <가보지 못한 길>로 넘어가는 것도 단 한 발자국이었다.
그 길에는 어떤 공간이 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밖에 나와보니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장군이 뒤에 서 있었다. 비록 장군이를 통해 고양이에 대한 낯섦은 아주 옅어 졌지만 안면 없는 고양이에 대한 무서움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리 안 가나!'라고 소리치면서 눈을 부릅뜨고 오른손 주먹을 위로 들어 올렸다.
왼손에는 장군이 사료 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러자 그 녀석도 놀라서 재빠른 동작으로 도망을 쳤다.
장군이 접시에 사료를 부어주고 나니 언제 왔는지 그 녀석이 울타리 밖에 서서 장군이가 사료 먹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미동도 없이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종전에 받은 나의 위협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담담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나도 한때 울타리 밖에서 울타리 안을 쳐다 본 적이 있다.
그 울타리는 길고 높았다.
나는 기억 속에 있는 감정 하나를 꺼내어 그 무늬를 햇빛에 비춰보았다. 무늬는 색이 바랬지만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는 여전히 알 수 있었다.
슬픔에 오기를 섞어 되새김하는데서 그려지는 무늬다.
담담함.
나는 갑자기 누그러진 마음으로 울타리 밖의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군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냥 조용히 서 있었다.
울타리 안의 장군이는 사료에 입을 조금 대고는 울타리 밖의 그 녀석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둘 사이에 울타리가 없어졌다.
울타리 밖의 그 녀석이 풍요였다.
아내는 그 녀석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이름도 이미 지어져 있었다.
“아빠. 걔가 풍요예요. 이름 좋죠? 안단테네랑 그렇게 지었어요. 우리 집도 앞으로는 더욱더 풍요로울 거예요. 안단테네도요”
아내는 유난히 밝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장군이가 부처님이에요.”
나는 무슨 말인가 했다. 장군이가 부처님이라니!
아내의 긴 설명을 요약해 보면 얼마 전에 장군이에게 동네 동생이 하나 생겼고, 장군이가 그 동네 동생을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집을 내어주고 본인은 밖에서 잤으며, 식사할 때도 동생 몫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밥그릇까지 동생에게 내어 준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오다가다 만난 배고픈 사람에게 “사는 게 힘들고 불편한 게 많지요? 이리 오셔요” 하면서
자기의 의식주를 거침없이 몽땅 내주었다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그제야 며칠 전에 안단테네가 아내에게 “언니. 우리 장군이 착하제? 맞제?”하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얼핏 들은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그 정도면 장군이가 생불이라고 생각했다.
장군이 입장에서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어쨌든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아내는 “장군이가 다음에 풍요를 데리고 오면 장군이 얼굴을 봐서라도 잘해 주세요. 풍요를 자기 친동생처럼 잘 챙겨 주려고 할 거예요”라고 단정하면서 고양이 사료 접시를 하나 더 준비해 놓겠다고 했다.
다음날은 내가 마당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채송화를 유심히 보고 있을 때였다. 분홍색, 흰색, 빨간색 등 여러 가지 색의 꽃들이 촘촘히 피어 있었는데 햇빛에 드러난 꽃잎의 투명한 질감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때 장군이와 풍요가 나란히 마당에 들어서는데 둘 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경쾌하고 활발해
보였다.
장군이가 먼저 내 발치에서 등을 땅에 대고 드러누워서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네발을 꼼지락거렸다.
전에도 장군이가 나를 만나면 종종 부리곤 했던 재롱이었다.
그때 풍요도 등을 땅에 대자마자 곧바로 후다닥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동작이 너무나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나도 '저게 무슨 동작이지?'하고 의아하게 생각했고 풍요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서 있는 자세가 머쓱하고 어정쩡해
보였다. 풍요를 만난 후 지금까지 재롱이라 불릴만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그때 본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이 다였다.
그때 풍요의 재롱 아닌 재롱은 아마 나와 장군이의 관계 속에 자신도 속하고자 하는 의지의 순간적인 표현일 것이라 생각한다.
울타리 밖에서 담담한 표정을 지었던 풍요가 장군이가 하는 것처럼 애교 넘치게 재롱을 부리지 않았지만,
혹은 못했지만(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풍요의 사교성 없는 성격을 감안해 보면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자신의 의사를 자신의 방식으로 나에게 전달은 한 것이다.
장군이는 장군이 이고, 풍요는 풍요일 것이다.
풍요도 언젠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홀로서야 할 것이고 그 홀로서기에 자유가 있을 것이다.
자유는 누구나가 다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린내가 나지 않아서 숨쉬기가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