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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생각 45_모항 노인

by 배정철

며칠째 집에만 있는 게 갑갑하여 걸으러 나갔다.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에서 모항해수욕장(서해랑길 45길)까지 걸었다. 오랜만에 가보고 싶었던 부안 내소사는 트레킹 후에 시간이 늦어 보지 못했다. 한겨울인데도 이번 겨울은 겨울 같지 않아 추위 걱정은 없었는데, 밤새 살짝 눈이 내린 게 마음에 걸렸다. 변산으로 내려가는 도로변에 눈이 조금 쌓였다. 다행히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아 얼지 않고 녹아서 질척거리기만 한다. 휴일인데도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도로에는 차량이 많지 않다. 곰소항까지는 차로 두 시간, 세종시에서 제법 멀다.


곰소항에서 젓갈 백반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허영만의 백반기행> 출연 식당이라 잔뜩 기대를 했건만 맛은 그저 그렇다. 식탁에 앉은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빠르게 차려지는 밥상은 어쩐지 성의 없어 보이고, 아홉 가지 젓갈은 너무 싱거워 젓갈 같지 않다. 하긴 진짜 젓갈처럼 짜면 아홉 가지를 어떻게 다 먹을 수 있겠나. 시래깃국은 미지근하고 너무 달다. 그나마 풀치조림이 먹을만하다. 이런 정도의 음식을 먹으며 그렇게 감탄을 하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곰소라는 말은 곰처럼 생긴 두 개의 섬과 그 섬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생긴 이름이다. 줄포항이 토사로 메워져 폐항이 되자 1938년 진서리 앞바다의 곰섬을 중심으로 동쪽의 범섬과 연동, 서쪽의 까치섬과 작도리를 잇는 제방을 쌓아 만든 항만이며 서해어업의 전진기지항이다.


곰소항은 변산반도와 바다 건너 해리면, 심원면, 부안면 사이의 줄포만의 어귀에 있다. 모항은 줄포만이 시작되는 곳이다. 서해랑길 45코스인 곰소항에서 도청리 모항까지는 15km, 자동차로 20분 거리지만, 도로와 방조제, 해안의 낮은 산길을 따라 걸으면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한겨울의 바닷바람은 원래 살을 에는 바람이라야 제맛인데, 이번 겨울은 예전의 그 겨울이 아니다. 흐린 겨울의 서해 바람에 먼 동토의 땅 시베리아의 공기는 섞여 있지 않다. 섞여 있다고 해도 시베리아도 그 옛날의 시베리아가 아닌 모양이다. 매섭지 않은 올겨울이 왠지 걱정이다.


흐린 날씨 탓인지, 어수선한 시국 때문인지 걷는 사람이 없다. 작은 숲길에 드문드문 무슨 무슨 동호회, 산악회 표식만이 이곳에 사람들이 제법 다녀갔다는 걸 알려준다. 어느 바닷가나 그렇듯 카페와 펜션이 서해의 갯벌을 향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곰소항 근처 작도마을 앞바다는 바닷물이 멀리 물러가고 서해의 갯벌을 드러내 놓고 있더니, 모항갯벌체험장에는 어느새 바닷물이 밀려들어 갯벌로 내려가는 철제 계단 아래까지 물이 찼다. 오늘은 보름이라 물이 들고나는 모양이 크고 사납다.


철 지난 모항해수욕장에는 지난여름, 텐트가 놓였던 자리에 번호표만 덩그러니 꽂혀 있다. 북적이던 주차장도 텅 비었다. 이곳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주차해 둔 차가 있는 곰소항까지 되돌아가야 하는데, 버스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아 조금 낭패다. 다행히 버스정류장은 사방 유리로 막혀 바람이 들지 않고, 벤치에 전기가 들어와 따뜻하다. 유리에 붙은 버스 시간표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사이 211번 버스가 들어온다. 곰소가 아니라 반대 방향 변산으로 가는 버스라 격포에서 갈아타야 하고, 거기서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급하게 화장실을 찾아가는 기사님이 알려 준다. 주말에만 운영하는 마실버스를 타면 내소사에서 기다렸다가 격포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곰소항으로 가야 한단다. 마실버스는 두 시간마다 오는데, 마지막 버스는 한 시간 반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키 큰 노인 한 분이 주차장 건너 저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버스 기사에게 단감을 두어 개 건네주고, 정류장으로 들어와서 나에게도 슬쩍 두 개 주신다. 바로 깎아 먹어니 달고 맛있다. 집에서 딴 게 아니라 오면서 얻었다고 한다. 버스 시간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자기 차로 곰소항까지 태워주겠다는 걸 사양했는데, 한참 있다가 와서 보고서 안 되겠다 싶은지 차를 가지고 오셨다.


고향 모항에서 혼자 지내시고, 부인과 아들, 딸은 모두 대전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뱃일을 해서 더 늙어 보인다고 멋쩍게 웃으신다. 대전, 세종, 충남 어디로 떠돌던 얘기, 마흔을 넘은 아들이 아직 장가를 못 갔다는 얘기, 외손주 보느라 모항으로 오지 못한다는 아내 얘기, 산불 감시원은 지난주까지 했다는 얘기, 내일 원광대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곰소항에 도착했다. 국밥이라도 드시라고 뒷좌석에 놓고 내린 돈을 도로 갖다 주시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든다.


돌아오는 길에 부안중앙시장 전주분식에서 팥칼국수와 바지락칼국수로 저녁을 먹었다. 주말 시장은 한산하기만 한데, 분식점에는 손님이 계속 찾아든다. 저녁 먹고도 팥칼국수 생각나서 왔다는 옆테이블 아저씨가 일어서며 한마디 한다.

"징하게 맛있네!"

모항 할아버지께 뜨끈한 팥칼국수 한 그릇 사다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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