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고 나면 뭐 하고 지내실 겁니까?"
"여행이나 다니지 뭐."
"어디로 다니실라고요?"
" 외국 여행도 좀 하고..."
은퇴를 앞둔 선배들에게 여쭤보면 여행을 다니겠다는 대답이 많다.
그런데 사실 이런 대답을 좀 더 귀 기울여 들어보면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여행이나'라는 대답에서 전해오는 속마음은 사실 여행 외에는 다른 계획이 없다는 뜻도 담겨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을 보면 여행을 잘 다니지도 못한다.
평소 현직에 있을 때 여행을 자주 다니지 못한 사람들은 은퇴 후에도 그런 모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놀아 본 사람이 놀 줄 안다고, 여행도 다녀 본 사람이 잘 다닌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해외여행 자주 가라고 권한다.
후배들, 젊은 교사들에게 해외여행을 잘 할 수 있는 두 가지 팁도 알려 준다.
간단하다.
첫째, 돈 모아서 여행 갈 생각하지 말고 마이너스 통장 만들어서 여행부터 다녀와서 갚아라.
둘째, 애들 데리고 가지 말고 부부끼리만 가라.
해외여행 가려고 한 달에 얼마씩 회비 내고 돈 모아서 결국 가 보지 못한 경험은 누구나 있다.
성공한 경험 보다는 실패한 경험이 더 많은 것도 확실하다.
일정이 안 맞아서, 시간이 안되어서, 또 그렇게 모아 놓은 돈 다른데 쓸데가 있어서 등등 핑계는 가지가지다.
작은 모임도 그렇지만 가족 여행도 마찬가지다.
푼돈 모아 몇 백만 원씩하는 해외여행 가는 게 쉽지 않다.
몇 년 전에, 아내랑 둘이 천만 원을 모아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하기로 한 적이 있다.
여러 해 걸쳐 그 돈은 모았지만, 결국 딸들 치아 교정하는 데 쓰고, 오피스텔 얻어주는 데 쓴다고 가지 못했다.
그러니 해외여행을 가고 싶으면 일단 떠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가급적 아이는 데리고 가지 않는 게 좋다고 권한다.
시댁이나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용돈을 두둑하게 드리고 가는 게 좋다.
아이에게 새로운 걸 보여주고, 낯선 경험시켜 주고픈 부모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부부끼리 가면 여러 모로 좋다.
경비도 적게 들고, 시간도 넉넉해지고, 이동성도 좋다.
부모 욕심에 새벽부터 저녁까지 박물관, 미술관, 성당 찾아 다니며 사진 찍어도 아이들에게는 별로 남는 게 없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어렵게 기다리다 세계적 명화 모나리자를 보고도 아이들은 결국 콜라만 찾는다.
부부만 가면 굳이 단체여행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캐리어 하나씩 끌고 배낭 여행을 가면 된다.
낯선 어느 골목 자그마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길 가는 사람들 쳐다만 보아도, ‘아 바로 이게 여행이구나’ 싶다.
육아에 지친 마음과 몸에 생기가 다시 돌고, 앞에 앉은 사람이 새롭게 보인다. 정말이다.
아이들 다 크고 둘 만의 여행을 해 보니 이제야 그런 걸 알게 되었으니, 후배들은 그러지 말라고 당부한다.
작년 여름, 그러니까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 겨울에 그리스 여행을 계획했었다.
아테네, 코린트, 아르고스, 스파르타를 돌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흔적을 따라 다니며 글을 쓸려고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 크레타 섬에 가서 조르바씨도 만나 볼 생각이었다.
학교 이전 문제로 겨울에는 시간을 내지 못했고, 여름에는 꼭 가야지 했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예전에 하던 그런 '여행'을 다시 할 수 있게 될까?
그나저나 '여행이나 하지 뭐' 했던 그 선배들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실까?
그 여행조차 맘대로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긴 속으로야 웃을지도 모른다.
남들 여행 다녀왔다는 자랑질에 배 아프지 않아도 되고, 방콕을 하고 있어도 아내의 구박에서 당분간은 해방이다.
돈도 굳었다.
‘맞아 맞아’ 하고 이 글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면,
당신도 꼰대임에 틀림없다.
<꼰대 생각>은 중년의 사소한 상념과 일상 이야기입니다. 꼰대인 줄 알지만 꼰대이고 싶지 않은 바람입니다.
<책의 이끌림, 2017>, <뇌가 섹시한 중년, 2019>를 출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