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판입니다. 차가운 대기가 벼를 베어낸 자리에 볼을 맞대고 있습니다. 흙은 조금 따뜻할까 살짝 만져보고는 우르르 찬바람을 일으키며 달아나네요. 봄이 오려면 좀 더 기다려야겠군, 하면서요. 쓸쓸하면서 평화롭습니다.
벼를 키우고 쌀알을 맺느라 밑거름이 되어 애쓴 흙을 봅니다. 지난봄엔 물을 가득 담은 채 작고 소중한 모종을 보드랍게 잡아주던 자리. 우렁이가 간지럽히던 여름을 지나, 다 자란 벼에 쌀알이 가득 열던 가을엔 보람도 컸을 것입니다.
쓰일 곳을 찾아 떠나 간 벼의 남은 밑동을 추억처럼 보듬고 있어요. 다시 봄을 기다리는 들판은 이 겨울에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지난가을 농부는 풍성한 수확을 하면서도 텅 빈 겨울을 보낼 누군가를 염려했습니다. 논 한구석 베지 않고 남겨둔 벼에 그의 마음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까치밥 먹은 지 오랜 까치가 전망 좋은 높은 음자리에 앉아 저녁거리를 찾고 있군요. 허공에 꽂아 놓은 꼬리가 움직임을 멈췄네요. 지금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 걸까요. 한참을 망설입니다. 그 아래 느릿느릿 지나가는 큰고니들. 빨리 가라 채근하지도 서로 뭐라 나무라지도 않고 조용히 무리를 이루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네요. 새 한 마리가 날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공간이 필요할까요. 비어 있어야 기를 수 있구나. 문득 알게 됩니다.
무심한 고라니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칩니다. 도망갈지 그냥 눌러 앉을지 판단이 안 서는 모양이에요. 반갑게 "안녕! 안녕!" 내 방식의 인사를 건네봅니다. 사고 걱정 없이 맘껏 뛰노는 모습을 보니 맘이 좋네요.
자라는 아이들을 볼 때 즐겁습니다. 먹고 놀고 자라는 모습 보는 것 자체가 행복한데 다른 무엇을 바랄까요. 겨울 들판도 비슷한 마음일 것입니다. 키우며 행복했던 기억이 벼의 남은 밑동처럼 들판에 가득하니까요. 찾아온 동물들이 겨울을 잘 나기를 바랄 것입니다.
자식이 성장하여 제 갈 길 떠났지만 안녕을 바라는 엄마의 마음. 겨울 들판은 쓸쓸하면서 평화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