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옷, 얇은 이불 그리고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는 것

by 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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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졌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올해 여름은 늦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여름이 오고야 말았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올해 여름이 참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년보다 습하고 더운 기운이 나를 삼켜버릴 듯 창밖에 서 있었다.


바깥은 반팔의 계절이었다. 옷장 밑에 있던 반팔을 꺼냈다. 얇고 가벼웠다. 여름은 싫지만 가벼운 옷은 좋다. 좋은 것에는 잠옷도 가벼워진다는 사실이 숨어있었다. 얇은 바지와 얇은 반팔 잠옷을 챙겼다.


겨울용 이불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오늘까지만 덮고 자자,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꼭 여름용 이불로 바꿔야지, 생각했다. 겨울의 서먹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는 듯 두꺼운 이불은 알록달록했다. 너는 곧 플라스틱 정리함에 들어갈 것이라고 속으로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가볍고 나풀거리는 시원한 이불을 꺼내 올 거라고.


계절의 변화는 다짐을 불러오기도 한다. 겨울에서 봄,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엔 가볍고 산뜻한 것들을 꺼내오기가 참 쉽다. 먼지 하나 없다는 듯 가볍게, 나는 얇은 옷과 얇은 이불을 꺼내 올 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지 않는 것도 분명 있었다.


옷과 이불을 바꾸는 것은 이렇게나 쉬운데 왜 묵직하고도 텁텁한 기억은 아무리 털어내도 털어내지 못하는지. 어느 날엔 털어내고 털어내다 이내 털어내지도 않고 다른 일들을 벌려 정신없이 살았고, 또 다른 날엔 털어내는 것에 지쳐 그냥 그 기억 속에서 썩어도 봤다. 정답은 없었고 방법도 없었다.


누군가는 시간이 흐르면 몇 가지 문제는 해결된다고 했다. 맞다. 몇 가지는 해결됐다. 잊혔고 사라졌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나를 향한 비난과 비난에 맞서는 내게 비난받을 만하다고 말하던 눈빛과 목소리들.


얼마나 더 살아내야 희석될 기억들일까.


기억은 희석되는 것이 맞나.


족집게로 쭉 뽑아서 몇몇 기억은 태워버리고 싶다고 밤마다 생각했다.


내 기억들은 때로 내 어깨에 쌓여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짓눌린 나는 기억에 얽매여 때로 이상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먼지처럼 털어도 털어지지 않는 기억들이 자꾸만 백발처럼 내 어깨 위로 쌓인다. 언젠가 사람들의 눈에도 내 칙칙한 기억들이 보일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무심결에 어깨를 터는 것도 이런 잡념들 사이에서 태어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털고 털다 보면 언젠가 깨끗하고 가벼운 몸이 되지 않을까. 얇은 옷과 얇은 이불을 아주 손쉽게 꺼내오는 것처럼 내 기억의 파도에도 여름밤의 가벼운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살아내는 날들 속에서 가볍게 헤엄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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