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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두둑 Sep 29. 2021

아직 심리상담은 사절입니다만(2)

원래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 상황만 있을 뿐.

엄마와 깊은 대화를 나눌수록 엄마의 감정에 다가가는 동시에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랑 혹은 아빠랑 대화할 때 엄마의 분노의 버튼을 누르는 말은 뭐야?"


엄마는 잠시의 고민 끝에 말문을 열었다.

'왜 항상 화부터 내?'

'이게 화날 일이야?'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어'


뜨끔. 돌이켜보니 엄마와 대화하면서 내가 자주 했던 말이다.

좀처럼 흥분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 나와 아빠가 사소한 말에 쉽게 발끈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튀어나온 말들이었다. 

 

엄마는 자신도 화를 잘 내는 사람인 건 알겠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낙인찍히는 기분과 함께 차단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구나' 하는 외로운 마음과 동시에 '나의 감정은 하찮은 것이구나', '난 왜 화를 주체할 수 없는 거지?'라는 자책감으로 이어져 더욱 화가 난다고 했다. 


내가 그동안 엄마를 '별일 아닌 것'에 '항상'화를 내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나는 화가 난 엄마의 모습이 먼저 보였던 것 같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엄마의 어떤 마음에 어떻게 닿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의 입장에서 별것 아닌 말은 엄마에게 별것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상처가 난 곳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아플 수 있다는 것도 간과했었다.


무의식적으로 '항상'이라는 단어를 어미에 붙여 엄마를 화내는 사람으로 낙인찍었던 것도 사실이다.

'항상'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문장 앞에 올 때 얼마나 상대방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틀 안에 가두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들을 때 발끈했던 적이 있다. '넌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 '넌 맨날 아니라고 하지' '넌 꼭 그러더라'라는 말을 들을 때 유난히 더 화가 난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단정 짓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거지 내가 항상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을 상대방이 몰라주기 때문에 분하고 화가 난다는 것을.


이후 우리 가족은 서로의 단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매일'이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제외하기로 약속했다. '왜 항상 화부터 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 한 템포 쉬고 '엄마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도 있겠네' '그 말이 엄마에게 상처가 되었구나'라고 관점을 엄마의 감정으로 옮기니 놀랍게도 엄마는 더 이상 크게 화를 내지 않으셨다. 대신 왜 그 말이 불편하게 들렸는지 비교적 차분하게 나에게 설명해주셨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발끈할 말이 아니었는데 내가 감정이 앞섰네"

엄마는 감정에 휩싸이는 대신 그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상대방의 감정을 인지해주고 인정해주었을 때 생기는 놀라운 변화였다. 


서로에게 칭찬을 할 때나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는 '매일' '항상'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기로 했다.

"엄만 항상 아름답고 귀여워"

"당신이 하는 음식은 언제나 맛있어"

"난 매일 엄마가 보고 싶어"

처음엔 낯간지러울지 몰라도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들이다.


우리는 사소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특히 내면에 상처가 많은 사람과 대화할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웃자고 말했더니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은 사실 원래 과잉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는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벼랑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원래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 상황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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