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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은영 Nov 24. 2022

[책을 써보기로 한다] 드라마 상영 끝. 다시 큐!

다소간 처량 맞게 또는 처절하게 들릴지도 모를 ‘드라마’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았으나, ‘이야기’, ‘서사’, ‘사연’ 등의 단어는 내가 겪은 복합적인 총체를 아우르는 단어로는 영 성에 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드라마’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엘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드라마란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인생이다.’ [Drama is life with the dull parts cut out.] 라고 했다. ‘책’이라는 형태로 농축하고 싶은 욕구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지랄 맞은 생각의 폭주는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가장 지루하지 않은 드라마 한 토막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장 헤매고 부딪혔던 아주 긴 시간, 무엇 하나 분명히 잡히지 않은 채 어떠한 드라이브도 걸리지 않고 하염없이 흐르는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내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을까’. 어느 하나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았고, 구체적인 작은 실천 하나도 어려운, 총체적 난국이었다. 세상이 크레딧을 부여하는 아웃풋이 없다고 해서 그 시간 전체를 뭉뚱그려 ‘지루한 것’으로 나 스스로 생각해 버린다면, 8년가량의 시간이 (각종 욕 버무려) 너무 아깝고, 억울하지 않겠나. 그래서 그 시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깨알같이 짚어내고, 해석하고, 나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어렵사리 하나의 길을 닦아 나아갈 길목에 서 있는 것이다.

뭐가 그렇게 막막하고 힘든 것이냐고 혹자는 묻곤 한다. 확신하건대, 육아에 전념하는 시간, 그것도 몇 개월을 넘어서 한 해 두 해, 그러다 사오 년이 넘어가는 그 시간을 겪어보지 않고, 몇 가지 경험의 단편만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시켜야만 하는 숙명에 있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의 구성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원이 추가로 투입되기에 가족의 이해가 필요하고, 그 구성안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적인 ‘이해 패키지’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호응을 얻기 어렵고, 호응이 없을 때 나는 행동할 힘을 잃기 때문이다. '이해 패키지'는 각자의 상황, 이해시켜야 하는 상대에 따라 다변화되는, 각자의 과제로 적극적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참고적으로 나의 경우에서,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겪으며 겪었던 가장 드라마적인 요소들로는,



육아 초기에 ‘나는 어미로서 내 숭고한 책임을 철저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

‘살면서 가장 큰 짜증의 감정을 경험한 것’,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마어마한 화를 내본 것’,

‘나 자신이 하염없이 초라하게 느껴진 것’,

‘내 존엄함을 세우기 위한 방법이 내 상식선에서 떠오르지 않았던 것(침해받은 존엄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화만 주야장천 낸 것)’,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여겼던 것’,

‘상황에 질질 끌려다닌 것’,

‘극도의 행복감과 최저점의 좌절의 나락을 동시에 느낀 것(정신분열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극도로 커서 온 신경을 아이에게 쓰는 나를 알게 된 것’,

그렇기에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하향 조절할 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어야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다시 한번 그렇기에 ‘자본주의 세상의 게임에 참여할 다양한 옵션들 앞에서 나는 시큰둥했다는 것’ 등이 있다.


그 힘들고도 힘들다고 이야기되는 독박 육아의 시간에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육아에 전념이 되어 있는 와중에, 사회활동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세워가는 실천 방법을 짜내고 실패하고 짜내고 실패해왔다. 일정 시간, 예를 들어 짧지 않은 네댓 시간 정도의 시간을 나 자신을 위해 할애하기 위해서는, 그 시간에 부여하는 목적성이 분명하여, 육아를 남편에게 맡기기에 떳떳해지는 수준이 되어야 집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힘든 육아의 시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족이 해주고 있겠고, 몇 번 정도 ‘해방’의 시간을 주는 것에는 너그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시간을 가져야 할 때는 특별한 명분이 반드시 준비되어야 당당해졌다. 그러나, 온 시간을 빈틈없이 아이의 캐어에 쏟아도 늘 부족한 것 같고, 아이의 요구에 맞춰 에너지를 채널링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시간은 조각조각이 나다 못해 분쇄되고 사라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 와중에 ‘명분’을 체계적으로 짜낸다는 것은 늘 회의적이 되었고, ‘에잇, 가시적인 성과도 그다지 예상되지 않는데, 내가 무슨 영화를 보려고 이렇게 애쓰는가.’ 싶어 그 생각의 끈을 놓고 또 놓게 되더라는 것이다. 나의 ‘일할 권리’를 챙기는 데에 어찌하여 이리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고, 현실에 나를 맞추는 것이 점점 어렵게 느껴지는 좌절감에 빠지게 되는 순서를 밟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할 힘을 잃어 많은 시간을 흘려보낸 것은 맞으나, 새로운 화두를 늘 던져주어 살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진행한 시간이기도 했다. 생각을 진행시키다가도 중간중간 방해 요소가 치고 들어와, 감정적으로 종이를 무자비하게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듯 쟁여놓은 상태에 있는 것들이 많다. 이것들을 다시 꺼내 곱씹으며 향후 실천을 계획하는 관점에서 냉철하게 바라보고, 관련한 이론의 내용을 적용하기도 하며, 그 시간이 담고 있었던 것들을 업사이클링된 콘텐츠로 정리해낸다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유용한 연료가 될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더욱 그 시간의 드라마가 ‘신파극’이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피할 것이다. 이미 배설적인 신파로 너무 다루어 왔기에 지긋지긋하다. 물론 신파적으로 풀며 온갖 감정을 토해내며 그것을 마주하는 것은 필요한 과정이었다. 다만 이제는 냉정하게 감정을 가다듬고 그다음을 계획하여야 할 때라고 절감하고 있다. 감정이 왜 그렇게도 생겨나는지에 대한 현실적 상황에 대한 분석적 사고가 없이는 그냥 ‘배설’로 끝나 버리며, 때론 감정이 날 집어삼켜 왜 그랬는지도 모른 체 감정만 계속 남아있게 되기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의 질척한 늪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린 뒤 망설임 없이 외친 ‘나는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선언은 나에게 물러서지 않을 수 있는 단단한 경계선을 그어주었다. 분명 어려운 상황은 맞지만, 상황과 외부 요인, 주변 사람이나 가족들 탓을 하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한탄만 하지 않고, 작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기어이 찾겠다고 ‘정신을 차리게 되는’ 사고의 기제가 생겼다. 그렇게 강력하진 않아서 언제 무너질지 몰라 불안하지만, 나는 나를 이대로 둘 수 없기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나의 감정의 자아를 다시 붙잡아 올리게 된다. 난 내가 아깝고, 내가 세상에 ‘점’ 하나 찍고 죽고 싶다는 것을 너무나 알고 있기 때문에 계속 그것을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려 한다. 그 기억은 내가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들을 통해 다시 살아나고 살아나고 살아나는 것이다.


내게 부여한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경력 공백의 시간에 나는 어떠한 현실적 프레임에 갇혀 있었는지 속속들이 파헤쳐 보려고 한다. 무엇이 의미 있었고 무엇이 소모적이었는지 정리해보면서 이 당황스러운 상황의 어떤 지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파악하고 그 당황스러움의 감정을 저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어떠한 논리로 나의 말과 행동이 펼쳐졌으며 무엇은 살리고 무엇은 고쳐볼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두 번째로, 나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유리한 해석을 해내어 나의 뇌를 편안하게 만들고 나를 위한 실천을 해갈 수 있는 사고의 프레임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콘텐츠를 만들고자 한다. 예를 들어, ‘남편의 역할’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육아와 가사를 반반씩 동등하게 분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아이와의 관계에 있어 절대적인 투입시간이 아내에게 편중되기 때문에 효율적인 면에서 아내가 좀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좋고, 물리적으로 반을 남편에게 분담하게 하기 위해 코치하는 아내의 에너지 소진이 그만큼 더 추가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남편을 큰 아들처럼 대하지 말자). 그래서 남편의 육아 및 가사 분담의 적정선을 ‘반’이 아닌 그 아래 어딘가에 두는 것이다. 그다음 남편에게 ‘아내’의 ‘캐어’라는 역할을 추가로 맡게 하는 것이다. 남편이 아닌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이다. 아내의 필요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에 맞추어 액션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고의 흐름을 정리하여 놓는다면 매번 짜증 나던 것이 그나마 몇 번으로 줄어들지 않겠는가. 이 외, ‘공간’, ‘시간’, ‘사람 관계’, ‘공동체’, ‘사회적 가치’, ‘건강’ 등 우리 머릿속에 들고 나는 많은 개념들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잠식시키는 방향으로 그 내용을 정리해놓아 나의 일에 대한 여러 결정들을 함에 있어 혼란스러움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세 번째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제안하고 역으로 사람들의 제안을 많이 들어보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결국 경력단절(또는 경력 보유) 여성을 포함한 여성들이 그들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문화적 활동으로서 사회에서 평가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자리는 문화예술적인 코드를 늘 적용하여 자신의 (사회적 실현) 욕구에 대한 발견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


네 번째로는, ‘욕구’에 집중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이다. 일단, 나의 본질에 닿은 이야기를 언어로 촘촘하게 풀어냄으로써 그것을 매개 삼아 다른 사람의 본질에 가닿고 싶다. 욕구와 닿은 본질을 어떻게 하면 더 적절히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심한다. 그렇게 이야기로 나의 정체성을 다시 세워 간다. 내가 살아갈 세상을 내 언어로 다시 세팅하고 그 안에서 살고 그것으로 연결되어 확장시키고자 한다.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한 다음 ‘욕구’에 대해 이야기하여야 ‘욕구’에만 집중한 뒤 그것이 실현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좌절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욕구’란 사회적 실현의 맥락에서의 욕구이며, 세상이라는 터전에서 나 스스로 인정되는,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타인에 의한 인정, 그 후 따라오는 자기만족과 다음 액션을 위한 동력 등에 집중하여 풀어내 보면 좋을 것 같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쉽다. 가족들을 다 챙긴 후 남는 시간에 자신을 챙기게 되기 일쑤이다. 제한된 시간적・물리적 자원의 특정 섹션에 나 자신을 위한 뚜렷한 목적성을 부여하려면 나의 ‘욕구’를 토대로 한 명분을 강력하게 마련하여야 스스로 설득이 되고 주변을 설득할 수 있게 된다. ‘욕구’라고 해서 무작정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늘만큼 땅만큼을 다 다뤄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현실을 먼저 파악한 다음 욕구를 이야기하는 순서를 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실천을 이야기할 때 어떤 실천인지에 대해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세상에는 경력단절 여성 대상의 자기 계발 프로그램들이 많다. 내가 경험한 것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자원이 확보되고, 무엇보다 ‘작심’을 어느 정도 해낸 분들이 진입 가능한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작심 이전 단계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잡히지 않아 하루하루 안갯속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이 느끼는 사람들의 그 마음에 방점을 찍는다. 동기 부여가 너무 일어나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위하여 손가락 몇 개 움직이는 것조차 회의적으로 여겨지는 순간들을 겪는 사람들에 중점을 둔다. 그래서 ‘욕구’와 그것의 ‘표현’을 위주로 함께 많은 활동을 도모해볼 생각이다. 이 활동들은 반드시 경제적 활동만을 위한 사전 준비가 아니다. 사회적 소통과 활동이 가능하도록 사회활동 아이덴티티를 세우는 활동이며, 그것이 이뤄진다면 그때는 아마도 각자 알아서 더욱 구체적인 활동으로 뻗어나가지 않을까 믿는다.


이러한 나의 의지와 경로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아까운 나의 친구들, 여자 사람들이 더욱더 살아나는 과정에 함께 하고 싶다. 그래, 나는 그것을 원한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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