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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22. 2023

끔찍하게 합선되는 인형실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존 말코비치 되기(1999)는 스파이크 존즈의 작품인데, 이 감독은 사랑의 불가능함을 통해 사랑을 논하는 사람인 것 같다. 영화 그녀(2013)는 결코 인간과 동등해질 수 없는 인공지능의 한계를 다뤘고, 이 영화에서는 어떠한 간절함으로도 얻을 수 없는 상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의 핵심 메타포인 인형술도 사실 사랑 실패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다. 크레이그는 인형술로 다른 존재가 돼서 좋다고 했는데, 존 말코비치라는 인형을 조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다. 크레이그는 예술가로서의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 레스터 박사와 무리들은 죽음, 양쪽 모두 자신들의 삶이 의도치 완결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동기다.



1. 가장 노골적인 자기 도피 



    크레이그는 인형술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인형술의 내용물은 전부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크레이그가 일으키는 논란은 인형극의 플롯이다. 보통 인형술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연되는데, 크레이그의 인형술은 아이들이 보기에는 적절치 않은 어둡고 날것의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크레이그의 인형술은 다른 존재로 연기하면서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현실의 자신은 돈도 못 벌고, 공연도 맘껏 못하고, 아내랑도 안 맞는 스트레스 가득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기가 참 고된 크레이그였기 때문에 맥신에게 끌린 것 같다. 그리고 끝까지 종적 행보를 보이는 그녀를 포기하지 못해 사랑할 자기 자신조차 잃는 결과를 맞이했다. 결국 크레이그는 실력 있는 인형술사지만 맥신의 실 달린 인형조차 되지 못하고 말코비치라는 생면부지의 인형 속 부재료가 되고 말았다. 크레이그는 그 인형이 인식조차 못하는, 완전히 불필요하고 완전히 사랑 못 받는 존재로 남았다. 



2. 유해한 나르시시즘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에게 주로 남은 물음은 이것일 것이다. “왜 맥심은 저렇게 못된 짓들을 할까?” 맥신이 단순히 싸가지 없는 소시오패스였다면 자신과 로테의 아이를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맥신이 소시오패스인 것은 맞지만 그 뒤틀린 감정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맥신은 이 영화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맥신은 너무나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완전히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그래서 매사에 자기중심적으로 상황을 만들고, 그럴 만한 카리스마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싸가지는 전부 자기애의 증명에서 기인하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는 바로 ‘조종’이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마음껏 조종하면서 삶의 만족을 느끼고, 지배욕을 충족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크레이그의 인형술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인간을 조종하는 자신에게 인형술은 상종 못할 무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를 연결 지으면 그들의 사업 시작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맥신은 크레이그가 관문을 찾았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확인도 안 하고 동업을 권유한다. 맥신의 냉철한 본래 성격을 생각하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맥신이 크레이그를 상상 이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인형술이나 하는 버러지가 감히 나에게 거짓말을 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맥신은 관문 사업을 통해 돈을 벌고, 모르는 고객들을 조종하는 유흥을 즐긴다. 그러다 크레이그의 아내 로테의 신체적 성과 정신적 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말코비치에게 다가간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그녀의 조종에 대한 미학은 ‘복잡함’이다. 다른 사람들이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일수록 자신의 우월감이 고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코비치를 조종함으로써 로테를 조종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녀는 슈와츠 부부를 모두 조종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감정을 무시하면서 조종의 미학을 고수하던 중, 크레이그가 말코비치를 완벽히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맥신은 이때 처음으로 크레이그를 인정하게 된다. 맥신은 명백한 조종의 수단인 관문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캐릭터인데, 이는 그녀의 자만심이라고 추측된다. 이 따위 비현실적인 수단 없이도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데, 한심한 크레이그의 인형술은 나름 경이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인정도 ‘상대’로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써다. 말코비치를 완벽히 조종하는 크레이그를 자신이 조종하고 있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상당한 충족인 셈이다. 


    그러다 마지막 변수가 발생했는데, 그녀의 임신이다. 추측건대, 애초에 임신은 맥신의 계획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기가 말코비치 안에 들어간 로테와 함께 만든 아기라는 사실도 나중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일련의 결과들은 맥신의 조종의 미학을 위배하는 것들이다. 여기서 두 가지 감정선이 추측된다.


1.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거스른 아이와 그런 일을 체험케 한 로테에게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


2. 자식이라는 가장 압제하며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을 얻었고, 그걸 통해 로테까지 조종해 미학을 담은 가정을 꾸리려 함


어느 쪽일지는 모르지만, 1번일 경우 마지막에 딸에게 지은 미소는 진짜일 것이다. 2번의 근거는 결혼 생활 중 맥신이 크레이그의 말을 무시하면서 인형에게 로테의 옷을 입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3. 설정과 상상



    이 문단에서는 영화의 전반적인 설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말 이후와 이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려 한다. 레스터가 어떻게 관문의 정확한 원리를 알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지극한 경험론의 결과라고 본다. 이 캐릭터의 중요한 특징은 권유다. 영혼의 형태로 불사를 영위하는 것은 혼자 해도 되는 일인데, 자꾸 사람들을 꼬드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크레이그와 레스터 박사는 둘 다 자기애를 실패했지만, 레스터는 사회를 사랑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반사회적인 크레이그와 달리 누군가의 머리통 속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도 옹기종기 모이려고 한 것 같다. 어쩌면 죄책감의 분할을 목적했을 수도 있고, 크레이그 같은 변수들을 힘으로 누르기 위한 일종의 카르텔일지도 모른다. 


    레스터와 일행들은 어떻게든 말코비치 속으로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크레이그는 말코비치의 딸 속에 갇혔다. 레스터의 언급에 따르면, 그 딸이 말코비치 이후의 육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훗날 말코비치가 늙어 죽고, 불어난 레스터 일행들이 그 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을 때, 크레이그에게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압도한다면 딸의 몸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런다면 맥신과 로테에게는 엄청난 날벼락이 될 것이다. 


    훌륭한 발상력과 일관된 메시지, 관객들 눈치 안 보는 비극적인 결말이 훌륭했다. 영화의 제목 ‘존 말코비치 되기’는 '나를 쓰레기 취급하기'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을 것 같다. 네이버 영화 정보란에 들어갔는데, 존 말코비치가 조연으로 뜨더라. 7과 1/2층은 두 가지 자세밖에 취하지 못한다. 고개를 숙여 서있거나, 소파나 의자에 앉아 안주하는 것. 전자는 자기애의 실패를 상징하고, 후자는 자기애의 실패를 방치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층은 애초에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사랑을 등지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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