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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Oct 02. 2023

나는 살아있으니까 이 정도면 됐다

 죽음과 삶, 결국 똑같은 것들



내가 유의미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친구가 수능을 불과 3주 앞두고, 등교하던 중 버스 사고로 죽었다. 그 친구와 엄청 친하지는 않았지만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서 충격이 컸다. 사고 당일 소식을 접한 나와 친구들은 복도 일부분을 점거하며 심각한 대화를 했다. 당시에는 아직 교회를 다니던 시절이라 친분이 있는 목사님께 개인적으로 연락드려 상담도 받았고, 새벽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때 모은 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짜 기도하는 손이었다. 


그러다 장례식이 끝난 후,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의미에서 장례차가 학교 운동장을 돌기로 했다. 전교생은 날짜와 시간을 문자로 확인받았다. 그때 내게 문제가 하나 생겼다. 한창 공부를 한 답시고 스마트폰을 포기하고 폴더폰을 쓰던 시절이었는데, 내가 그 문자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것이다. 폴더폰을 핑계로 댈 수도 있지만 그건 엄청난 부주의였다. 장례차는 일요일에 왔는데, 나는 다음날 월요일 학교에 가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느낀 패닉을 다시 반추하면 소름이 돋는다. 3학년 같은 반 친구들에게 처음 소식을 접하고,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과도 얘기를 했는데, 걔네는 나를 그날 못 본 것 같다는 추측을 제기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어물쩍 넘겨버렸다. 친구들이 그런 실수를 한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 무서웠다. 내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묵비권을 행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침대에 혼자 누워있는 그날 밤은 정말 지옥이었다. 표정 험한 형사가 나를 때리고 싶은데, 확실한 명분으로 더 세게 때리기 위해 인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맞은편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엄청난 한심함을 느꼈다. 속된 말로, 뭐 이런 병신 같은 새끼가 다 있나. 그 문자 하나를 제대로 안 봐서 그 중요한 자리에 방에서 잠이나 쳐 자고, 나중에 친구들한테 제대로 얘기도 못하냐. 이 일은 내게 큰 앙금으로 남았다. 나중에 심리상담에서 문장완성검사를 했을 때, 이렇게 작성했다.  


n.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 죽음을 수단화한 것이다. 


상담사님은 이 답을 보고 내게 물어보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이다. 그날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남에게 꺼냈다. 내 얘기를 듣고 상담사님은 두 가지 의견을 내비치셨다. 첫째로, 내가 당시에 "아니야, 나도 그날 왔었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냥 명확히 대답을 안 한 거지. 둘째로, 보통 일이 아니긴 했지만, '죽음을 수단화'한다는 표현은 너무 거창하다. 


상담사님은 이 문장을 처음 보셨을 때, 내가 예전에 자살을 빌미로 가족이나 친구를 협박한 건 아닌지 예상했다고 하셨다. 그 정도 일이 아니니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냥 실수라고. 


충격이 컸다. 그게 죄가 아닐 거라는 시야는 애당초 내 의식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눈이 틔였다. 심리상담의 가장 큰 장점이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마음의 짐을 많이 덜었고, 지금은 누가 특별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원하면 이 이야기를 꺼내 의견을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편해졌다. 



그 후로 죽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 봤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죽는다는 건 그냥 언제나 눈에 보이지만 냄새는 맡을 수 없는 음식 그림 같았다. 분명 저 음식은 어딘가에서 실존하고 있을 텐데, 일단 내게는 그냥 색깔 몇 개로 뭉쳐진 평면이고, 와중에 취향도 고약해서 아름답지 않았다. 이렇게 정리하고 끝내버리면 너무 막연한 것 같아서, 살면서 겪은 죽음과 가까웠던 일들을 반추해 보니, 어쩔 때는 소름이 돋다가도 굳이 의미가 있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약속 때문에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중 내 앞사람이 퍽하고 머리부터 쓰러진 적이 있었다. 워낙 요란하게 쓰러졌던 지라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 대여섯 명이 그 사람 곁에 모였다. 누구는 손가락, 발가락을 주물러 줬고, 누구는 119에 신고했으며, 나는 그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주변 편의점에서 플라스틱 박스를 가져왔다. 우리는 그 사람이 조촐하게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도와드렸고,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했다.


쓰러진 사람은 70대 전후의 여성 분이었고, 그 나이대에 쉽게 연상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색감은 화려하지만 의도는 찾아볼 수 없는 옷가지들이 어영부영 모여있었다. 그분은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쓰러지신 것 같았고, 다행히 외상도 심하지 않아서 금방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가 건넨 질문들은 정말 기초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이었다. 보호자가 있는지, 또 그때 지나친 골목은 잘 사는 동네가 아닌지라 기초수급대상자인지, 앓고 있는 지병이 있는지 같은 감정이 별로 안 들어있는 질문들 말이다. 


그 노인은 어떤 질문이든 비슷한 대답을 하셨다. 그 대답은 구급차에서 내린 의료진들의 더욱 정돈된 질문에도 변함없었다. 노인이 구급차를 기다리는 7분 동안 약 스무 번 넘게 하신 대답은 “나 혼자 살아요”였다. 아파요, 119 불러줘요, 하물며 나 병원 갈 돈 없어요도 아닌 그 말을 가장 많이 하셨고, 그 사실이 내게 큰 인상을 주었다. 안전하게 병원으로 이송을 마치고, 옆에 계셨던 아저씨가 젊은 사람이 좋은 일을 했다며 내게 악수를 청하셨다. 나는 그 악수를 무덤덤한 표정으로 받았지만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평소에 시시콜콜한 얘기도 친구들에게 곧잘 얘기하던 내가 그날 친구들을 만나서 이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언제는 산책하러 집 앞 공원으로 갔는데, 웬 구급차가 입구에서 빨간빛을 번쩍이며 서 있었다. 구급대원 몇 분이서 바닥 쪽을 보고 계셨는데, 어떤 아저씨가 쓰러져 있었다. 팔다리는 중력의 미세한 간섭을 여실히 느끼며 축 늘어져 있었다. 어렸을 적 편의점 벤치에서 라면을 끓이다 바닥에 떨어트리면 딱 저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토를 했다 안 했다 하셨는데, 처음 카페일을 시작한 사람이 낸 우유거품처럼 애매모호한 점도의 하얀 웅덩이가 그 사람 입 근처 바닥에 생겼다. 그 광경을 평소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나무 몇 그루를 엄호물삼아 바라보고 있으니, 구급차가 팔짱을 끼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황상 아저씨가 거나하게 취해서 구급차가 올 정도였나 보다. 대충 그러려니 하고 아저씨가 들것에 실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구급대원 중 한 분이 '찍지 마세요.'라고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보다 앞쪽에 있는 사람이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쓰러져 있는 아저씨를 찍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 사람이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 재미야 있을 수 있지. 나도 자리를 안 뜨고 멀찍이 서서 보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걸 카메라에 담는 건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 사람은 모르는 아저씨가 술에 취해 쓰러져서 카메라에 담은 거다. 급성 질환이 터져서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으면 감히 카메라를 들었을까? 막말로 구급차에 실려간 그 아저씨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 하얀 웅덩이가 유언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그 사람 입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나도 사실 죽을 뻔한 것 같다. 작년에 대학교 친구들끼리 부산에 놀러 갔는데, 새벽 3시쯤에 술을 먹다가 불꽃놀이가 하고 싶어졌다. 그때 우리가 생각한 게, 한 명이 사진을 찍는데 그 뒤에 폭죽을 날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불꽃축제처럼 만드는 거였다. 내가 폭죽을 쏘는 담당이었다. 여기서 내 얄팍한 상식이 나를 죽일 뻔했다. 그때 내가 생각하기에 자고로 화기라 함은, 총구가 있으면 도화선은 반대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다란 폭죽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도화선을 가슴 방향으로 잡아 하늘을 겨냥했다. 그때 다른 친구들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서 폭죽이 터질 때까지 아무도 멈춰주지 않았다. 


내 서늘한 직감만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폭죽이 터지기 전에 살짝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첫 발이 내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를 지나 모래사장에 꽂혔다. 폭죽에서 심장을 흔드는 반동을 느꼈고, 황급히 폭죽을 뒤집어 똑같이 어두운 밤하늘이지만 최대한 멀어 보이는 곳에다 버리다시피 남은 불꽃을 쐈다. 내가 그때 폭죽을 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가슴 5cm 내외의 거리에서 터진 폭죽을 맞았으면 화상 정도로 안 끝나지 않았을까? 심지어 새벽 3시였는데, 외딴 해변에 구급차가 제때 올 수 있었을까? 불꽃 할복을 할 뻔한 바로 다음날도 웃으면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며 연결 짓자니 괜히 감사함을 느낀다. 



누가 죽은 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일들을 접하다 보니 죽음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게 결론이다. 옴서 감서 인사하는 죽음이란 게 나한테 던진 말은 다 삶이라는 영역에서 찾아 겪게 될 것들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아직 몸이 멀쩡하고 장례식을 많이 안 겪어서 그럴지도 모르는데, 죽음을 그렇게 특별한 것으로 취급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골프장 알바 마지막 날에 퇴근하고 버스를 타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타지 않는 다른 정류장 버스 안내도에 누가 기대서 졸고 있었다. 차도랑 굉장히 가까워서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가장 끔찍한 과속방지턱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깨워서 위험하다고 하니, '응!'이라 말하고 다시 잤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강제로 몸을 움직여서 인도에 눕혀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반년 동안 일하느라 고생한 이 동네에 당분간은 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기운이 팍 식었다. 그래, 니 알아서 해라라는 마인드로 거기서 신경 끄고 내 버스나 타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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