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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Oct 02. 2023

하루 대중교통비 2만 원의 결과

여행 비슷한 것에 대하여


나는 여행을 그닥 선호하지 않는다. 가자고 마음먹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짐을 싸지만, 친구들에게 먼저 어디 가자고 얘기를 꺼낸 적은 거의 없다.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일단 돈이 없고, 아직 해보지 못한 게 너무 많아서 굳이 멀리 안 나가도 쉬는 날이 비지는 않았다. 그러니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않았고, 곧 부산으로 떠나는 대학교 mt도 돈이 너무 많이 깨져 취소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여행을 떠나도 항상 새로운 환경보다는 새로운 환경에 빠진 자신에 집중하느라 단독 활동이 좋았다. 눈 떠보면 친구들에게 생뚱맞게 어디를 같이 가자고 했고, 아무도 들은 체 안 하면 혼자서 거기를 가 버렸다. 친구들이 오후에 카페에서 쉬고 있으면 옆에 있는 전시회에 무작정 갔다 와서 니들 지금 어디 갔냐며 전화를 걸었고, 작년에 영화제를 보러 부산에 와서는 아쿠아리움을 가야 한다며 단체로 보기로 한 영화 예매를 취소하고. 그런 식이었다. 곧 떠날 올해 부산 mt에서도 3박 4일 동안 우격다짐으로 바이올린을 들고 다니기로 했다. 성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두 곳에다 연락을 넣어 합주 한 번만 껴도 되냐고 여쭤보고 허락도 구했다. 


이번에 글 여러 장을 쓰면서 예전에 끄적인 것들을 읽어봤는데, 가장 나다운 여행기를 발견했다. 왕십리 위쪽에는 우이신설선이라는 경전철이 있다. 거기서 2021년에 문화예술철도라는 명목 하에 테마를 잡고 전시회를 열었다. 각 역마다 민간광고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예술 작품을 전시했다. 당시 나는 거기에 꽂혀서 하루 날 잡고 우이신설선의 작품들을 관람했고, 이에 관한 방문담을 작성했다. 


읽어보니 문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엉터리였고, 지구력이 부족해 악을 쓰며 의무감으로 완성한 게 눈이 보이는 글이었다. 끌리지도 않는 비유를 억지로 쓰면서 겉멋만 들어서는 정작 중요한 감상은 빈약했다. 사진도 제대로 안 남겨놔서 무슨 작품을 어떻게 봤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어제, 어떤 유튜브 채널에서 미술관이 된 지하철역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봤다. 바쁜 일상 속에서 정신없이 흘려 보내는 지하철 역사에 여러 그림과 사진을 걸어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였다. 굉장히 흥미로웠고, 마침 라섹을 하기 전에 뜻 깊은 활동을 하고 싶었던 내게 계획을 세우게 했다. 


결국 바로 다음날에 우이신설을 순회하며 이색 투어를 하기로 했다. 사이트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해 거를 역을 걸러 총 7개의 역을 방문하기로 했다. 또, 계획 상 마지막 역인 솔밭공원에서 내려 근처 솔밭근린공원도 들르기로 했다. 시멘트 방을 노닐다 자연 경관까지 즐길 생각을 하니 벌서 구미가 당겼다. 


돌아오는 길에 동묘앞역에서 맥도날드를 먹기로 했다. 내 집 주변에는 맥도날드가 없어 평소 기회가 없었고, 예술과 비예술, 일상과 비일상의 양립에 취합하는, 투어의 본질과 어울리는 식사라고 생각했다. >


그냥 햄버거가 먹고 싶었던 주제에, 멋있어 보이는 반의어를 되는 대로 갖다 쓰면서 꼴값을 떨고 있었다. 당시 내 기획력의 한계가 맥도날드라니 글에서 풋내가 진동했다. 다음 문단에는 기상과 출발이라는 제목으로, 당일 늦게 일어났지만 의지를 다지고 여행길에 나선 내가 대단하다고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게 뭐 길게 쓸 일이라고 먹은 점심 메뉴까지 재미없게 읊은 꼴을 보니 우이신설선으로 간 날도, 이 방문담을 쓴 다음 날도 여간 신난 게 아니었구나 느껴졌다. 그러다 제대로 까먹고 있었던 일을 상기할 수 있었다. 


< 지하철을 갈아타는 중에 어떤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본인이 스카우트 담당이라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며 일해볼 생각이 없냐는 소리였다. 


나는 유수 같은 모션으로 이미 직업이 있다며 고맙다고 그를 물리쳤다. 분명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 직원이었을 것이다. 분명한 게 내가 일하고 싶을 만큼 좋은 직장은 저런 주먹구구식 채용을 절대 안 한다. 또한 내가 그에게 보여준 것은 내 외모뿐인데, ㅋㅋㅋㅋ 이미 설명은 끝난 셈이다. >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캐스팅 제의를 받은 날이었다. 분명 그 아저씨가 내게 제안하려던 일은 캐스팅이라는 단어랑 거리가 멀었을 거다. 그래도 나는 그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했다. 제의한 사람에 대한 예의 이런 거 때문은 아니고, 경험에 대한 존경 때문이다. 확률이야 낮지만 저 아저씨가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꿀 줄 누가 알겠는가? 하다못해 그때 자세히 이야기를 들었으면 글감으로라도 썼겠지. 근데 당시 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일축했고, 과외로 일주일에 4시간 일하는 주제에 직장 있다며 으스댔고, 자학까지 섞으며 비웃어 넘겼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날은 하늘색 모피 재킷을 입었어서 분명 거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어린 나는 인생을 오지게 쉽게 사는 놈이었다.   


다음 문단에서 본격적인 관람이 시작됐는데, 여기서 굳이 깊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역에서는 사람들 시선에 눈치 보여 충분히 관람하지 못했단다. 삼부작으로 얽혀있지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지금 읽어보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정거장 세 개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긴 에스컬레이터 양쪽에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두 층을 왕복 세 번인가 돌았고, 그 에스컬레이터를 탄 이용객 중 자기만 고개를 돌렸다며 좋았다는 내용도 귀여워만 하고 보내주기로 했다. 그러다 삼양사거리 역에서 느낀 감상은 비교적 흥미가 생겼다. 


< 이 역은 내가 이 투어를 기대할 때 가장 이목이 끌렸던 곳이다. 다니엘 경이라는 작가가 ‘믿음이 필요한 풍경’이라는 제목의 사진 합성 작품이었는데 세계 곳곳의 사진에 정체불명의 해양 생물체를 추가해 코스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이런 의도와 작품 결과에 공명하는 듯한 감정을 받았고 사진도 두 장이나 남겼다. 하지만 해양 생물체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가는 노란색 병아리 같은 생물체와 붉은색 가오리 같은 해양 생물체를 오브제로 삼았는데 붉은색 가오리는 그 머리 위에 반짝거리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나는 이게 굉장히 거슬렸다. 이 해양생물체들은 물론 작가가 주입한 이미지지만 현실과 어우러지는 환상이다. 즉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믿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는 제목에서 반증한다. 


하지만 그 왕관이 작가의 존재감을 증폭하기에 작품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건 작가의 킥 같은 익살이겠지만 내 눈엔 별로였다. 실제로 나는 노란 생물체와 붉은색 생물체를 각각 한 장씩 남겼는데 붉은색 생물체를 사용한 작품은 그 구도와 해상도 상 그 왕관이 안 보이는 작품이었다. 나는 왕관의 불편함을 이 작품을 관찰하다 왕관의 일관성을 조사하던 중 발견했다. 이는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


그때 작성한 그대로 여기에 옮기는 건 많이 괴로운 일이었다. 심각한 비문들을 살려주는 일은 내게 너무나 버거운 박애주의였다. 그래도 이 글이 아마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생각하고 쓴 비평이었다. 저작권 문제가 복잡하니 그때 찍은 사진을 올리지는 않을 거지만, 지금 그 사진들을 보니 이 방문기에 담긴 감정과 공감할 수 있었다. 이 방문기에 몇 안 되는 수명이 2년을 겨우 넘긴 문장들이었다. 


영화 비평을 여러 장 쓴 지금 다시 보니, 발견한 아이디어는 좋은데, 그걸 발견한 과정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걸 한 발짝 바깥에서 설명했어야지. 역시 어린놈은 어린 값을 하는 것 같다. 이후 내용도 간단히 읊고 넘어가려 한다. 


챙겨 온 단백질 바를 몇 개 입에 욱여넣으며 배고픔을 달랜 나는 관람을 마치고 솔밭공원 역에서 하차했다. 역에서 솔밭공원으로 가는 중에 개념 없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로에서 어른 둘, 아이 둘이 줄넘기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대놓고 해서 그 줄을 줄넘기도 안 하는 주변 사람들이 피해 다녔어야 했다. 이때도 서툴지만 감정 섞인 관찰은 상시로 하고 있었나 보다. 방문담에는 익숙한 혐오와 신선함이 느껴졌다고, 또 단어로 잘난 척하며 표현돼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서 빨빨대던 여정의 마지막 산림욕은 좌절됐다. 당시에는 마스크 착용이 필수였는데, 기온이 낮아서 안경에 김이 자꾸 서렸다. 도무지 소나무를 볼 수 없었던 나는 공원 산책을 포기하고 지하철로 다시 향했다. 이 날 감각기관의 소중함을 깨닫고 라섹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모두 사라졌다. 그 후로 시각을 내가 가진 직관 중 가장 소중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라섹 시술을 받는 그 순간에도 그랬다. 라섹은 레이저로 눈을 깎는 것이고, 레이저도 광원이니 당연히 볼 수 있다. 내가 시술을 받은 병원에서만 그런 레이저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빛은 빨간 도마뱀의 피부를 얇게 본떠서 야광물질로 굳힌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직후에 소독하느라 안구를 붓질한 건 소름이 돋았지만 말이다. 


방문기 마지막을 보니 반년 정도 지난 날짜에 쓴 글이 따로 있었다. 그때 찍은 작품 사진들로 미술 수업에서 몽타주 과제를 완성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름 알뜰살뜰하게 살았나 보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날 우이신설선을 돌아다니며 교통비로 2만 원은 넘게 썼다. 치사하게 교통카드를 찍고 나가야 볼 수 있는 작품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 2만 원으로 완성도 부족한 젖색 글이 태어났고, 그 글을 지금 읽어보며 곧 떠날 부산 여행에 대한 생각이 바로잡혔다. 아직 친구들에게 비행기랑 ktx 값을 못 줬는데, 주말에 단기 알바라도 뛰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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