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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Jan 21. 2023

시간이 머문 곳

 설을 맞아 친정에 내려왔다. 수서역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릴 때부터 아이들을 보러 대구로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KTX를 갈아타기 위해 동대구역에 내리자 익숙한 역사 풍경이 나를 맞았다. 그래도, 이제 괜찮았다.


 부모님은 벌써 21년째 같은 집에 살고 계시다. 이 집으로 이사를 하며 그전 집 물건을 거의 버리지 않으셨다. 꼭 필요한 물건만 집약되어 있는 우리 집이 미니멀리즘에 가깝다면, 부모님 댁은 시멀리즘이다. 그전보다 집이 많이 커진 이유도 있겠지만, 엄마는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편이시다. 이사를 하며 새로 산 가구와 그전에 쓰던 가구 스타일이 너무 달라 어색했는데, 어색한대로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시간이 머물러있다. 초등학교 때 치던 피아노 위에는 고등학생 때 유행했던 스타샷 사진이 올려져 있다. 그 사진은 이전 집 근처 호수에서 찍었다. 식탁  벽엔 스물세 살 때 엄마, 나, 남동생이 같이 홋카이도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과 동생 졸업 사진, 동생 결혼사진, 부모님께서 같이 무대에서 하모니카 부는 사진이 붙어있다. 밥을 먹는 풍경에서 보이는 사진은 마치 그때와 함께 식사를 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벽에는 조카가 그린 그림 몇 점과 조카가 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 옆에 딸들 사진과 딸들이 엉성하게 색칠한 포켓몬 두 마리도 있다.    

 아이들이 세 살 되던 해 봄에 엑스가 둘 다 시댁에 데려간다더니 둘째를 나와 상의도 없이 친정에 맡겨버렸다. 그 후 나는 삼 개월간 매주 이곳을 오갔다. 대구에 있던 첫째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던 힘든 시기였다. 부모님은 잘 있다고 걱정 말라고 했지만 나는 부모님과 둘째 모두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주말에 얼굴을 보고 헤어질 때 울던 놀이터 앞은 지나가기만 해도 가슴이 아렸었는데 이제는 힘들었던 시절로 과거가 되어 남았다. 마치 역사를 담은 박물관 같은 이곳 중 다른 무엇보다 딸의 흔적이 가장 생각나는 걸 보면 그래도 내가 엄마는 엄마구나 싶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차가운 바깥공기와 대조되는 훈훈함이 음식 냄새와 섞여 나를 따스히 맞아주었다.

 "왔니?"

 켜켜이 쌓인 과거를 보고 싶지 않아 때로 외면하고 싶었던 곳. 하지만 20년 넘게 늘 곁에 있었던 건 결국 가족뿐이었다.

 남향의 햇빛 덕분인지 이름 모를 란 두 개 꽃이 폈다. 하나는 선홍색 한 송이가, 하나는 흰 기다란 꽃이 줄을 지어 흐드러졌다. 부모님께 나와 동생의 성장은 당신들의 역사기도 했을까?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 같은 이 공간에 앉아 나의 이혼도 생각해 본다. 그것은 개인적인 아픔이었으나 어쩌면 조금 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꼭 거쳐야 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이혼하지 않아도 될 만큼 화목했다면, 난 제 잘난 맛에 내 자식생각하 주위 사람들과는 자주 불화하며 지냈을 것 같다. 어느 것이 더 나쁜지 좋은지는  없는 노릇이나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지금이 나는 제법 마음에 든다.


 엄마의 화장대에는 어디서 받은 화장품도 잘 버리지 않아 유효기간이 지난 것들 투성이다. 엄마께 말씀드리려다가 괜한 짓일 것 같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성향이 다르니 함께 사는 게 힘들었던 게 당연했다 싶다. 아, 어른이 되어 독립해 혼자 사니 또한 얼마나 좋은가! 


 주방 한쪽에 유럽 여행을 다녀오며 루브르에서 산 예쁜 컵이 보인다. 나도 잊고 있었던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포근하게 안아준다. 내가 주었던 많은 사랑도 미움도 알 수는 없지만 이 세상 어딘가 이렇게 남아있을 것 같다. 그 사랑과 미움을 받은 사람이 모두 가족은 아니라 이렇듯 명절마다 만나지 못해 알지 못할 뿐. 그렇다면 앞으로는 될 수 있는 한 좋은 것만 주고 싶다. 내가 사라져도 내가 준 마음이 세상 어딘가에 이렇듯 고이 남아있을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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