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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r 04. 2023

꽃 같은 사람

 부처님 말씀 중에 “향을 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 비린내가 난다”라는 말이 있다. 어제 프리지어와 거베라, 장미, 유칼립투스가 섞인 한 다발을 사서 거실 화병에 꽂아두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그 향을 맡고 이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집안에 들인 꽃으로 인해 꽃향기가 가득하듯이, 내 삶에 누구를 들이는가에 따라 내 인생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삼일절은 개학 전날이라 늘 걱정이 되고 도망가고 싶어 진다. 이번에는 특히 오랜만에 5학년을 맡아 그 증상이 더 심했다. 하지만 막상 아침 일찍 가서 맞은 아이들 얼굴을 보며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다 보니 역시 그간의 교사 생활이 허투는 아니었는지 금방 긴장이 풀어졌다.     


 “오늘만 선생님한테 궁금한 거 질문해. 다른 날은 대답 안 해줄 거야.”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뒤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선생님, 언제 결혼하셨어요?”

 “서른두 살 때.”

 대답을 하며 알았다. 결혼한 지 벌써 십 년이 되어가는구나. 어떻게 보면 십 년도 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는 건가.

 “그러면 십 주년 때 뭐 하시고 싶으세요?”

 글쎄.

 “술 한 잔 하지 않을까?”

 “와하하.”

 아이들은 속도 모르고 웃었다.

 “선생님, 결혼한 게 후회돼서요?”

 ‘그래, 맞다 이놈아.’

 속으로만 답했다.      


 목, 금 이틀간 우리는 어느 정도 친해졌다. 3학년을 맡다 5학년을 보니 키와 덩치가 훨씬 크게 느껴져서 아직 적응 중이다. 남자아이들 몇몇 하교 인사를 한 후 바로 가지 않고 눈을 맞추며 다가왔다. 어디서 배웠는지 한쪽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잔을 잡는 시늉을 한다.

 “자, 선생님. 건배!”

 “이게 뭐야.”

 내 두 딸도 벌써 어른들 따라 잔을 부딪치는 시늉을 하니, 열두 살 아이들에게는 그저 장난일 것이다.  '교육적으로 이건 좀 아닌데...'

 싶어 멈칫하다가, 결국 정색하지 않고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나도 오른손을 동그랗게 모아 그 작은 손에 맞부딪혔다.

 “주말 잘 보내.”




 금요일에는 할 일이 많아 퇴근을 제때 못했다. 집에 돌아와 씻고 저녁 열 시도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에 다시 일어나자마자 일. 바쁘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팬케이크 맛집에 혼자 차를 몰고 가서 거한 아침을 시켰다. 돌아오는 길은 배는 불렀지만 다소 쓸쓸했다.


 누군가와 너무 가까워서 괴로웠던 결혼 생활을 떠올려본다. 전남편과 계속 붙어있다가는 나도 썩은 내가 날 것 같아 사력을 다해 떨어졌다. 힘들게 찾은 자유 속에 행복하지만 사람인지라 때로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 그건 다시 내 고유의 향을 잃어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별거 후 매 년 모습을 기록하는 용도로 찍기 시작한 사진이 벌써 네 개다. 일렬로 쭈욱 서 있는 액자들을 바라보며 지금 나란 사람에게서 어떤 향이 날까 궁금해진다.


 올해 우리 반 아이들이 나로 인해 꽃향기를 맡았으면, 그리고 그 꽃향기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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