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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글사글 Jun 05. 2020

그 누구도 타인의 정체성을 비난할 자격은 없으니까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보고 느꼈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열려 있고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했었다. 그렇다고 남 앞에서 티를 낸 것도,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니지만 내심, 무의식적으로는 늘 그랬었나 보다. 그런 내게 ‘너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야’ 하고 한 방 먹인 영화였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라는 점을 안 순간부터 자연스레 예상하게 되는 플롯이 있었다. 주인공들은 서로 굳건히 사랑하지만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 용인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개인적인 혼란 등에 의해 상처받고 좌절에 빠진다. 그러면 영화를 보는 사람은 주인공이 동성애자라서 겪는 짐과 아픔을 안타까워하고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와 그 속의 사람들에 화를 낸다. 하지만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전혀 다른 여운을 남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델과 엠마의 사랑만 보였다. <노트북>을 보면서 노아와 앨리의 사랑에 감정 이입했고, <500일의 썸머>를 보면서 톰과 썸머의 관계가 어긋나는 데에서 마음 아팠듯이. 


출처 :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아델과 엠마는 사랑에 빠지고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지만, 서로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고 갈등을 겪다 끝내 이별한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안에서 서로를 변화하고 성장하게 하는데, 이는 이별 후 서로의 색으로 물든 두 사람의 모습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아름다우면서도 가슴 아픈, 두 사람 모두 여자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랑이었다. 성 소수자의 사랑도 그저 사랑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도덕적이지 못한 사랑이 아닌 이상 함부로 비난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하다. 특히 인터넷상에는 익명의 탈을 쓰고 쏟아내는 원색적 비난으로 가득하다.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님에도 상처 주는 표현을 쏟아낸다. 우리는 그 누구도 타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없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대사를 빌리자면, 내가 나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이유로 상처 줄 자격도 명분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 

출처 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혐오와 차별은 결국 나와는 다르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혐오까지는 나아가지 않더라도 ‘구분 짓기’는 소수자를 소외시키고, 진정한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나와는 성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왜 그리도 거리를 두고 선을 그었을까? 그런 내 속마음을 마주하자 부끄러웠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느끼는 편협한 태도는 좁디 좁은 세상에 스스로를 가둔다. 각각 다른 개성과 정체성을 가친 다채로운 세상을 볼 수 없게 한다. 우리 사회처럼 성 소수자에게 닫혀 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어려서부터 편견이 주입되기 쉽다. 내가 그랬듯, 그들을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이방인을 대하듯 하기 쉽고, 적극 손 내밀고 지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럴수록 이런 ‘계기’, 진심으로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열게 하는 계기가 많아져야 한다. 나에게 계기는 영화였다.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울리는 글이, 실제 성 소수자 커플의 이야기가, 음악이 계기일 수 있다. 단 한 명일지라도 우리의 글이, 우리의 목소리가 계기가 되어 마음을 움직이길 바라기에 우리는 계속 이야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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