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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금 Oct 09. 2023

프랑스로 떠나고 싶었던 이유




  이 이야기는 대학교 첫 수강신청이 망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나는, 만 18세의 어리버리한 고졸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였다. '대학에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어!'라는 야심찬 포부를 담아 미리 짜놨던 시간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끝났다. 뭐야 이게-! 이것저것 남은 것들을 담아봤지만 엉망진창이 된 시간표. 이게 아닌데… 하필 인문학부인지라 제2외국어가 필수 수강과목이었다. 알아보니까 일본어, 중국어, 한문 강의는 인기가 많아서 잘하는 애들도 많고 금방 마감된다던데, 진짜로 다 찼네. 어디 보자.. 남은 게 프랑스어? 세상에 프랑스어..? 나 아무것도 모르는데..!



  쭈삣거리며 홀로 들어선 3월 첫 주의 넓다란 강의실, 차갑던 기운이 아직도 기억난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우아한 얼굴의 프랑스어 교수님. 그분은 내 인생 처음으로 본 우아함의 결정체였다. 프랑스어 교수님은 곧바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꽤 프랑스어를 잘했다. 프랑스어는 배울수록 재밌었고, 교수님이 좋았기에 첫 학기 말에 A학점을 받아 들었다. 프랑스어를 더 배우고 싶어 두 번째 학기에도 프랑스어 강의를 수강했고, 또 A학점이라는 쾌거에 기분이 좋아 프랑스언어문화학 복수전공을 신청했다.








  내 꿈은 역사학자로 당연히 주전공은 사학이다. 그런 내가 프랑스언어문화학을 복수 전공한 건 정말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프랑스어가 좋다는 일념 하나로 복수전공을 하다니, 원래 성격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아직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조금 고민하다가 신청 버튼을 눌러버렸다. 전공이 두 개면 좋을 거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미쳤었지, 어리니까 할 수 있는 생각과 선택이었다. 그렇게 프랑스언어문화학을 복수 전공하며 한 번 빼고 A학점을 휩쓸었다. 프랑스어과 교수님들도 사학과에서 온 애가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하냐며 나를 예뻐하셨다. 정작 본전공에서는 겔겔대기 일쑤여서 나는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한 프랑스어과 수업에 더 열성적이었다. 좋은 교수님들께 프랑스어, 프랑스 문화, 프랑스 예술, 프랑스 사회, 프랑스 역사 등을 배우며 프랑스에 대한 열망을 키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본전공인 역사와 연계시켜 프랑스 역사학자 되겠다며 꿈의 노선을 틀었다.



  사학과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논문이 필수였다. 내 인생은 대학 입학 후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휴학? 없어 그런 거. 논문? 그까짓 거 쓰면 되지! 아주 건방진 태도로 마지막 학기에 입성했다. 그런데 하필 내 졸업논문 지도교수님으로 《F 폭격기》 교수님에 당첨되어 버리고 말았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악랄함에 사학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교수님이었다. 논문 첫 수업에서 두 명이 “자네는 내 수업을 듣지 못하겠구만”이라는 교수님의 말을 듣고 쫓겨났다. 살벌했다. 매주 논문 연구에 관해 여러 형태의 글을 써서 내고 공개적으로 평가 시간을 갖는데 너무 감당하기 어려워 휴학하려고 했다. 이런 건.. 내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간절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3번이나 논문 주제를 거절당하고 마지막에 그나마 제일 잘 아는 프랑스 예술에 대해 졸업논문을 쓰겠다 해 간신히 통과받았다. 돈이 한 푼도 없는 고로 프랑스 현지답사를 가지 못했지만 졸업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가득한 상태라 미친 듯이 논문에 매달렸고, 그 열정과 나쁘지 않은 결과물에 F를 면해 다행히 초스피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의 시련은 20대부터 시작한다고들 한다. 나도 그랬다. 대학원만 바라보며 4년을 내달렸는데 졸업과 동시에 고대로 고꾸라졌다. 그 이유는 부모님의 갑작스런 대학원 지원 거절. 교수님들께 잘한다 잘한다 소리만 들어 아주 오만해질 대로 오만해진 나는, 프랑스 대학원을 목표하며 알아보던 차였다. 대학 졸업 후 막 22살이 된지라 여전히 어렸고 어리숙하고 어리버리했다. 돈이 급했기에 어디든 받아주는 곳에 취직했고, 한평생 공주처럼 살아오다 반년 동안 으른 세상의 쓴맛을 오지게 보니 충격과 실의에 빠졌고 병에 걸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 정말 태생이 공주였나..?) 아프니까 1년 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극적인 상태로 24살을 맞이했다.



  너무나 프랑스 대학원에 가고 싶었다. 공부를 더 해서 역사연구자,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다. 프랑스에 가면 프랑스어도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해외에 산다는 내적 허영심도 채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잘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잘난 맛에 사는 게 즐거운 인생이라 생각하니까. 그런데 못 간다. 돈도 없고 자신감도 잃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절박했다. 프랑스 대학원에 가고 싶었다. 아프기 전까지 일하며 모은 돈을 탈탈 털어 22살에 프랑스에 며칠 다녀온 걸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부모님하고 대판 싸웠다. 동생은 천만 원짜리 세계여행, 반년짜리 필리핀 어학연수 보내주면서 왜 나는 안 해주냐고, 왜 나는 안되냐고.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 천재가 아니라서, 재능이 없어서 지원 못해주겠다고 되받아쳤다. 나는 억울하고 속상해서 대성통곡했다. 내가 프랑스에서 공부하지 못한다면 마지막 눈감는 순간에 너무 후회될 것이라고 울면서 소리쳤다. 그 말에 엄마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다음날이었는지, 며칠 뒤였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엄마가 생각해 봤다며 프랑스 어학연수 비용을 지원해 주겠으니 가는 건 다 네가 알아서 가라고 했다.



  당장 프랑스 어학연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복잡한지 준비만 5개월이 걸렸다. 6개월짜리 어학 코스에서 더 뻐기다 대학원 석사학위까지 하고 오겠다는 목표를 남몰래 삼았다. 먼저 대학원 최소 입학자격인 프랑스어 공인인증 시험 DELF(델프) B2에 최대한 빨리 합격하고, 안정적 입학자격인 DALF(달프) C1까지 합격하면 이제 내 인생은 아무 문제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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