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속 고딕 지구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

by 사과실

9월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바르셀로나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터라 이미 빠삭한 친구들을 따라다녔다. 스페인식 지명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한 달이 지나서야 혼자서 시내를 나갈 용기가 생겼다. 한국에서 가져간 여행 책자를 살펴보며 어디를 가볼까 고민했다. 이미 가본 곳은 제외하고 혼자 가기에 위험한 곳도 제외하니 한 곳으로 답이 나왔다. 바르셀로나의 심장 같은 곳,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가볼 수밖에 없는 곳, 바로 Gothic Quarter였다. 고딕 지구는 벌써 '고딕'이라는 말부터 나를 설레게 했다. 어렸을 때 고딕 양식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어서 도서관에 가 고딕 건축 양식에 관한 책을 빌려 읽은 적이 있다. 두꺼운 편은 아니었고 그림이 많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전문 용어를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았고 그저 그림에 빠져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 이름부터 고딕인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페로카릴을 타면 자연스레 머리를 기대 잠들었다. '사'는 내가 페로카릴에서 자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자면 심심하니까. 그래서 둘만 나갈 때는 동글동글 눈을 떴지만 셋만 넘어가면 죄책감에서 벗어나 편히 잠들었다. 페로카릴이 아닌 바르셀로나의 지하철에서 잠을 자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소매치기의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잠에 빠져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잘 잤다. 그런 나를 보며 '하'는 현지인이냐고 놀렸다. 혼자서 처음 시내로 나갔던 날, 나는 페로카릴에서 한숨도 못 잤다. 나를 지켜봐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편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S2 라인의 페로카릴은 Peu del Funicular(페우 델 푸니쿨라)역까지는 지상을 달린다. 덕분에 절반은 바깥 풍경을 보며 지루함을 달랠 수 있었다.




고딕 지구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람블라를 마주 봤을 때 람블라의 오른쪽에 있다. 가우디와 관련한 건축물을 제외한 웬만한 명소는 고딕 지구에 쏠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르셀로나는 전체적으로 바둑판식이지만 고딕 지구는 최대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길이 구불구불 복잡하다. 처음에 고딕 지구로 들어섰을 때는 걸어도 걸어도 같은 곳만 나오는 현상을 마주해 난감했지만 한 겨울이 됐을 때에는 무의식으로도 충분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길을 먼저 기억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IMG_20141018_153500.jpg 산 펠리프 네리(Sant Felip Neri) 광장. 스페인 내란 때 생긴 총탄 자국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고딕 지구는 크게 두 군데로 나눌 수 있다. 이것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인데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썼던 방법이다. 첫 번째는 Catedral de Barcelona 구역이다. 카테드랄은 두 가지 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하나는 람블라에서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가는 길에 쇼핑을 할만한 잡화점이 많아서 들르는 재미가 있다. 다른 하나는 람블라가 아니라 그 옆 블록에 천사 거리를 통해서 가는 것이다. 거리 이름에 Angel 들어가서 천사 거리라고 불렀다. 천사 거리는 람블라보다 훨씬 조용하고 넓다. 대형 스파 브랜드 가게가 즐비한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디즈니 스토어가 나온다. 천사 거리를 갈 때마다 디즈니 스토어에 들어가 심바와 날라를 구경하고 한국으로 가져가는 상상을 했다. 결국 심바는 나와 같이 귀국했고 날라는 나중에 '하'가 구매대행을 해줘서 '사'와 함께 귀국했다. 언젠가 내 손에 넣겠다던 다짐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디즈니 스토어를 지나 테라스가 달린 멋들어진 식당에서 꺾으면 카테드랄이 나온다.


카테드랄 안에는 작은 정원이 있는데 정원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게 된다. 리옹에서 '타'가 왔을 때 카테드랄을 처음 갔었는데 우연히 정원으로 연결되는 문을 발견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엔 혼자 방문해서인지 정확한 위치가 기억이 나지 않아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지 못했고 아쉽게도 그냥 밖으로 나왔다. 정원을 찾지 못한 것이 아쉬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타'가 600g이나 사간 추로스도 카테드랄 구역에 있다. 시에스타에 걸려 문을 닫은 추로스 집을 지나면서 '타'를 떠올렸다.




카테드랄 구역을 지나 Bisbe 길을 따라 Sant Jaume 광장에 들어섰다. 비스베 길은 옛 분위기를 물씬 풍겼는데 마치 19세기의 거리에 있는 느낌이었다. 눈치챌 새도 없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매력적이다. 산 자우메 광장은 La Merce(메르세 축제) 기간 인간 탑 쌓기를 보기 위해 가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람블라와 광장을 이어주는 Ferran 거리가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북적였는데 그날은 한산했다. 유럽 특유라 할 수 있는 네모난 회색 돌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정교한 그림이 새겨진 예쁜 상자 속에 파는 쿠키 가게가 나왔다. 나를 반기는 자동문을 지나 들어가니 점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시식용 쿠키 조각을 건넸다. 미소에 화답하며 쿠키를 입에 넣는 순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구매로 이어질뻔한 것을 가격이 가로막았다. 체념하며 가게를 나왔다.


IMG_20141015_161629.jpg Ferran 거리의 과자 가게


사람으로 북적이는 람블라를 피해 아비뇽 거리를 따라 옆 블록으로 건너갔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떠올렸더니 그림 속 처녀들이 보이는듯했다. 지도 없이 조그마한 가방 하나만 들고 천천히 거리를 걷고 있으니 진짜 현지인이 된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봐야 한다는 부담도 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이 '발이 닿는 대로' 걸었더니 어느새 고딕 지구의 끝에 도착했다.




고딕 지구를 벗어났을 때 나는 몸을 틀어 고딕 지구의 테두리를 둘러봤다. 람블라의 반대편이자 Jaume(자우메) 1 역과 닿아있는 곳. 관광객은 찾아볼 수 없었고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었다. 하늘은 Via Laietana 거리와 어울리기 위해 흐려졌고 담담하고 무거운 거리의 분위기는 빗방울을 불러낼 것 같았다. 비는 우울한 것이 아니라 설레는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전환점의 역할도 수행한다. 그곳은 그런 느낌을 자아냈다.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았고 내가 이야기 속, 역사 속의 주인공이 될 것만 같은 기분.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웅장하고, 근거도 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고딕 지구의 테두리를 그려냈다.


내가 사진을 찍는 가장 큰 이유는 엽서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다. 어딘가를 놀러 가면 엽서에 집착하는데 그곳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담아낸 것이 엽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판되는 엽서에 내가 본 모든 장면이 담겨있지는 않다. 내가 본 바로 그 순간 그곳을 담아낸 엽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시에 카메라를 켠다. 그 순간 속 감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으면 후에 완벽히 재현할 수는 없더라도 추억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역학을 한다. 이후에도 고딕 지구를 여러 번 갔고 그때마다 카메라는 쉬지 못했다. 기억하고 싶은 바로 그 순간이 자주 찾아왔고 그런 순간이 잦아질수록 고딕 지구와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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