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기다리는 가을의 시작에서
10월이 가까워오자 일교차가 커졌다. 낮에는 반팔도 입을 수 있었지만 밤에는 솜이불이 필요했다. 스페인을 떠올리면 마냥 덥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환절기가 아니더라도 일교차가 10도 이상 날 때가 많아 항상 감기의 위험이 있었고, 두꺼운 코트와 잠바를 넉넉히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특히 기숙사가 있는 동네에는 산이 있어 페로카릴에서 내릴 때면 람블라 거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찬 기운이 순식간에 몸을 감쌌다.
이렇게 어설프게 추워지면 난 더 유난을 떨고 싶어 한다. 아직도 멀었지만 10월부터 크리스마스 배경 영화를 보면서 추운 분위기를 내보고, 극세사 이불을 꺼내서 목 끝까지 바짝 당겨 덮으면서 추위에 떠는 착각을 해본다. 추위에 몸은 움츠러들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항상 들떴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도, 새해를 기다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겨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결심한 것이 아이스 스케이트였다. 먼저 제안한 사람은 '하'였다.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Camp Nou(캄프 누) 옆에 아이스링크장이 있다고 얘기하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게 '하', '사', '가'와 나는 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스케이트장이 있는 동네는 굉장히 평범했다. 옛 정취를 풍기는 전형적인 유럽식 건축물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거 같은 복도식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단지 안에는 놀이터까지 있어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친근한 풍경을 둘러보며 걸어가다 보니 금세 아이스링크장에 도착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의 경기장 옆에 아담하게 위치한 곳으로 들어가니 찬 공기가 느껴졌다. 남들보다 빨리 겨울을 만끽한 것에 신나서 순식간에 링크장을 달렸다. 땀이 나도 찬 공기덕에 금방 식어서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이었다. '하'는 스케이트를 제안한 사람답게 잘 탔다. '가'도 그럭저럭 타는 편이었는데 '사'는 아니었다. 벽에 기대어 쉬기를 반복했고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진을 많이 찍어줬는데 아이스링크가 반사판 역할을 해줘서 4명의 얼굴이 세상 환했다.
극심한 일교차를 견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따듯한 이불이었다. 내 침대는 창가에 바로 붙어있어서 벽으로 찬기운이 스멀스멀 들어왔다. 밤중에 몸을 뒤척이다 벽에 살이라도 닿는 때에는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예상치 못한 추위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네타방의 친구들도 새벽만 되면 뚝뚝 떨어지는 기온을 탓하며 월동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항상 한 발 빠른 '하'는 이케아에서 산 도톰한 이불을 보여줬다. 새하얗고 두께가 있어 올록볼록한 이불은 30유로를 넘지 않았고, 따듯한 이불을 찾아다녔던 우리는 이케아를 가기로 결심했다.
친구들은 이미 이케아가 어떤 브랜드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곳이었고 경험에 미루어 봤을 때 백화점의 가구 매장 정도로 생각했다.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의 이케아는 Sabadell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다. 항상 시내 방향으로만 달렸던 페로카릴이 처음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미 사바델을 가본 적이 있는 친구들은 작은 람블라 같다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적절한지 우리가 내린 역의 이름은 'Sabadell Rambla(사바델 람블라)'였다.
날을 잘 골랐던 걸까? 햇살을 가득 담아 다시 내뿜는 사바델의 모습은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동네였다. 붐비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휑하지도 않은 거리, 적당히 활기를 띠는 가게들, 반짝반짝 빛나는 가로수. 사바델은 정말 예쁜 곳이었다. 우리는 젤라토를 하나씩 사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먹었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니 사바델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 날은 확실한 목표를 성취해야 했다.
이케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알깜포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놀라움의 크기와 비슷했다. 휑한 땅덩어리 위에 하나의 단지처럼 양옆에 맥도날드와 메르카도나를 끼고 있는 모습이 위풍당당했다. 반면에 안은 아기자기했다. 마치 모델하우스를 옮겨놓은 것처럼 세팅이 잘 되어있는 방들이 주르륵 이어졌다. 예쁘게 꾸며 놓은 부엌과 방을 보니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 들었다. 제품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불에만 집중하는 데 성공했다. 작은 사치로 오렌지 향초를 산 것만 빼면.
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하얀 이불을 덮어놓으니 마음이 훈훈했다. 이불이 하얀 까닭은 커버를 사지 않았기 때문인데 네타방 어느 누구도 커버를 구입하는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 작은 장식장 위에는 향초를 올려뒀다. 그제야 깨달았다. 향초를 피우려면 불이 필요하고, 나에게는 마땅한 도구가 없다는 것을.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향초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렇게 조금 이른 월동 준비가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