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에서 학생으로

룸메이트와 수업은 개강과 함께 찾아온다

by 사과실

바르셀로나에 적응해갈 때쯤 학기가 시작했고 '타'는 600g의 추로스와 함께 프랑스 리옹으로 돌아갔다. 바르셀로나의 추로스는 람블라에 가면 꼭 생각나는 맛이었고 리옹으로 가져가기에 충분했다. '타'를 떠나보내자 관광객의 삶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그랬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수업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개강과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난 2개의 강의만 신청했고 화목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공식적인 학습 시간이었다. 태어나서 이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던가? 화요일 아침, 8시에 눈을 떠서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이제껏 수도권에 살았던 지라 학교까지 1시간 반 가량의 통학 시간을 견뎌야 했고 기숙사에서 살거나 자취를 해 본 적이 없었다. 9시 수업인데도 불구하고 8시에만 일어나도 여유 있게 도착하는 시간 절약과 편리함이 신선했다.


스페인어를 하나도 못하면서 어떻게 수업을 들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나는 영국 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 영문학 수업만 들었다. 덕분에 스페인어를 몰라도 수업을 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희한한 것이 개강을 했지만 아직 수강신청이 완료된 상태는 아니었다. 가신청은 완료한 상태였지만 같은 강의가 4~5개가 열리는 시스템이었고 교수님과 강의실만 다를 뿐 시간과 주제는 똑같았다. 나는 자연스레 제일 먼저 올라와있는 강의를 가신청 했고 그 강의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교수님이 맡으셨다. 첫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으로 이루어졌고 성적, 시험, 과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시험 중에는 책을 읽고 보는 퀴즈가 있었다. 책 제목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




굳이 책을 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아니,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영화가 아닌 책으로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영화로는 대사를 외울 정도로 수도 없이 반복해서 봤기 때문에 선뜻 책을 사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긴 것이, 한국에서라면 고민 없이 샀을 테니 말이다. 일단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내로 나가 fnac이라는 서점을 갔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형서점인데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전자기기 종류도 팔고 있었다. 처음 갔던 서점에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찾을 수 없었다. 2~3곳을 더 다닌 결과 딱 한 권의 책을 찾을 수 있었다. 한 권 밖에 없는 것을 보니 사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고, 무엇보다 나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브리짓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면 책을 구입할 가치가 있었다.


브리짓을 만나기 위해 여러 군데에 서점을 돌아다녔을 때 베스트셀러 코너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던 책이 있었다. 유서 깊은 건물과 인물의 사진이 표지에 실려있었기에 역사책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한 두 번은 힐끗 보고 넘어갔지만 모든 서점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한 모습을 보니 책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책 제목을 인터넷에 검색했고 그것은 '지옥(Inferno)'였다. 영화 '인페르노'를 볼 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이다.




학기가 시작했으니 당연히 룸메이트도 기숙사에 도착했다. 기숙사는 아파트형이었고 내가 쓴 4인실 아파트에는 2인실 방 두 개가 있었다. 룸메이트와 플랫 메이트는 모두 스페인 사람이었고 셋은 같은 과 친구들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유아교육 전공인데 이제 갓 1학년을 마친 풋풋한 학생들이었다. 룸메이트는 아기자기한 물건을 많이 가져왔다. 침대 위에도 귀여운 인형들이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남자 친구와 같이 찍은 사진으로 가득한 보드가 세워져 있었다. 룸메이트 얼굴을 보기 전에 물건들을 먼저 만났는데 성격이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세 명의 메이트 중 플랫 메이트 한 명과 가장 처음 만났다. L은 흑발의 까무잡잡한 피부인데 글래머러스한 몸매 덕분에 눈에 띄는 편이었다. 우리가 스페인 여자를 생각했을 때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에 근접했는데 웃는 모습이 예뻤다. 그다음에 만난 메이트는 또 다른 플랫 메이트였다. A는 큰 키의 곱슬거리는 금발머리고 광대 부분이 귀엽게 도드라졌다. 세 명의 메이트 중 가장 깔끔한 성격이었고 결벽증에 가까운 나는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같이 산 지 보름 만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A는 채식주의자였다. 무자비하게 고기 냄새를 풍겼던 것이 그제야 미안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메이트가 바로 나와 같이 방을 쓰는 룸메이트, M이었다. 긴 금발 머리의 목소리가 독특한 친구였는데 정말 착했다. 결론적으로는 세 명 다 착했지만 M은 나와 같이 방을 썼기에 더 자주 느낄 수 있었다. M의 어머니께서는 동양에 관심이 많으셨고, 그 덕에 '띠'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돼지띠라고 소개하는 모습이 귀여웠고 신기했다.




수업을 듣고 밥을 해 먹고 빨래를 하며 생활의 안정을 찾아갔다. 메이트들은 금요일 밤만 되면 꼬박꼬박 집으로 갔기에 주말은 온전히 나 혼자서 집 전체를 쓸 수 있었다.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이 많았는데 차 시간이나 통금을 신경 쓰지 않고 새벽 2시에도 거침없이 만나서 라면을 끓여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렵게 구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결론적으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다음 주에 있었던 수강신청에서 나는 다른 교수님이 하시는 같은 강의를 선택했고(내가 들었던 강의는 수강인원이 다 찼다) 그 강의에서는 'The snapper'라는 다른 책을 읽어야 했다. 반항심과 허탈함에 '안 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같은 수업을 듣던 스페인 여학생이 자신에게 책 파일이 있다며 보내줬다. 주어진 것을 외면하는 성격은 아니기에 읽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재밌었다. 우연히 임신을 하게 된 10대 여학생의 얘기인데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지, 그리고 여학생의 태도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다루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미혼모라는 사회 공동체적 시선으로 보았을 주제가 좀 다르게 느껴졌다. 물론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결정이라는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꼈다. 이제 모든 것은 나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나를 잘 알기에 충고해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당장 내 옆에 없었다. 내 선택과 책임이 앞으로 더 막중해질 것이라는 기대는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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