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살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로 돌리지만 죽어서 더 자주 기억되는 이가 있다. 너머를 꿈꾸다 보면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이 함께할 때가 있다.
시간 너머로 물러나야 할 자들이 불쑥불쑥 어깨를 두드렸다. 낙엽 떨어진 거리를 소리 없이 따라 걷기도 했고, 비 고인 웅덩이에 얼굴을 불쑥 내밀기도 했다. 차를 마시는 옆자리에 앉아 읽는 소설의 책장을 대신 넘겨주기도 했다.
심장에 새겨진 이가 그렇다. 빛바래지 않고,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자주 깊이 기억되어 죽음을 산다.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간다.
물결 지는 웅덩이 속, 20살 무렵의 나를 들여다본다.
죽음이 가장 가까웠던 시절이었으나, 가장 멀리 있는 듯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아갈 날들만을 생각했다. ‘젊어서 죽음’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에 죽어가는 이들이 있어도 그 운 나쁜 케이스에 내가 발목 잡힐 일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뜨거운 시절이었기에 차가운 죽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어깨동무한 서로의 열기는 죽음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누군가가 어제 죽었고, 오늘도 죽었다. 또 누군가 내일도 죽어갈 것이다.
누구든 제물로 죽어갈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운이 나빠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가족을 이루지 못했으며, 살아남지 못했을 뿐이다. 운이 좋아 살았다면 나처럼 한숨 내쉬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을 이들이었다.
선택할 수 있었던 삶을 선택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생을 제물로 바쳐 살아가는 존재다.
누군가의 삶은 계속되었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안도하며 자신이 증오했던 사회에 빠르게 편입하려 애썼다. 이어진 삶을 희망과 투쟁보다 포기와 환멸로 채웠다. 오늘과 내일의 암울한 경계에서 쫓기느라 흘리는 한숨이 아니라…. 자신과 자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안락한 삶을 위해 내쉬는 한숨이 늘었다.
같은 시절에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이 소시민 생활에 안주하고 있지만, 그런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살아내지 못한 이들의 삶을 누리는 것도 삶이다. 운이 좋았던 우리가, 운이 나빠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어깨가 늘 무거운 것은 죽은 자들이 바랐던, 그들 몫 소시민의 삶까지 살아내기 때문이다.
먼저 죽은 자들이 놓친 몫까지 얹고서 시대를 살아야 한다.
잔물결이 출렁이는 주말의 강변에는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며 가족들의 웃음이 흘렀다.
열기와 함성의 깃발 드높던 그 날이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 속에 어우러졌다.
이런 날에는 죽은 자들이 선연히 살아난다.
죽음을 뒤집어쓴 자들이 따라붙었다.
다시 나의 현실이 스산한 바람에 흔들렸다.
사회와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다가 이제야 잔잔해진 물결에 안도했건만….
망각이 아니다. 푸르렀던 나날, 우리를 휩쓸었던 파도가 다시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삶을 이은 나는, 여전히 죽은 자들과 걷는 길에 한숨을 내쉰다.
세월이 묻어있는 나와는 달리 변함없는 그때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함께이다.
늙어지는 법 없는 자들과 함께하며 나만 홀로 빛바래져 간다.
체념이 아니다.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숨 고르기를 하는 것이다.
나와 우리 대신 죽는 바람에 누리지 못한 자들이 이 길을 함께 한다.
운 좋았던 자가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다만 이 안온한 삶의 대가를 잊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죽은 이들을 오래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