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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지유 Aug 19. 2022

[오늘의 단상단편] 일기의 효용성

2022년 8월 19일

[일기의 효용성]



언제였나?

김훈 작가 신작 《하얼빈》이 출간됐다는 방송을 봤다.

신작이 궁금한 게 아니라, 인터뷰가 신경 쓰였다. 안중근 의사의 책(어떤? 기억 안 나네.)과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두 책을 평생 마음에 두고 살았고 그래서 이번 책을 썼다고 했다.


김훈 작가의 이런 인터뷰를 들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네. 대체 어떤 책이기에?



안중근 의사는 건드릴 타이밍이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알아 가는데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은 엄청나다. 잠깐 웃고 마는 드라마 시청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럴 시간도 소화할 능력도 없다. 시간만 말아먹을 게 뻔하다. 내가 다가갈 있는 영역을, 가능성 있는 쪽을 건드려야 한다.


  《난중일기》는 다행히도 이미 침 발라 놓은 책이다. 

얼마 전, 김경일 교수 때문에 마침 난중일기를 잠깐잠깐 읽었다. 제대로 읽을 시간은 없어서 핸드폰의 (폴라리스 앱) 읽어주기 기능으로 듣고 있었다. 

몇 번을 읽다가 관두고, 몇 번을 듣다가 포기. 읽거나 듣거나 몇 번 하다가 말았다. 

그다지 끌리지 않아 금세 잊고 덮어버렸다.



유구한 인류사에서 매일 일기를 적은 이가 얼마나 될까? 떠올려보라 얼마나 되는지. 극히 드물다.

떠올린 그 ‘일기’들은 또 어떤가? 극히 적은 일기들이 극도의 시대 상황 속에서 적혔다.


대단하긴 했다.

문신도 아닌 무신 장군이 하루도 거름이 없이 매일 일기를 쓰셨다. 

제목부터가 《난중일기》다. 이순신 장군이 그냥 장군이고 맡은 바 할 일만 하며 살 수 있었던 시절이라면 이 일기가 쓰였을까?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일기를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었기에 남기고자 하신 게 아닐까?


 단 한 줄에 불과할지라도 양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한 문장일지라도 매일 적으려 한 마음가짐 자체가 보통 사람과 다름을 뜻한다. ‘별일 없음’이라는 한 문장을 적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다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둑함 속에서 먹을 갈고, 종이를 펴고, 붓을 들고 정좌했을 모습을 상상해봤다. 


노트북에 틱틱틱! 잘 미끄러지는 볼펜으로 끼적끼적! 

근데도 귀찮아서 새해에 며칠 쓰고 마는 게 우리네 일기! 

장군의 일기는 우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수고스러웠겠구나! 

화살 맞은 몸으로 책상 앞에 앉아, 한 줄 일기를 적었을 모습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날짜만 반복하고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나 ‘활 10순을 쏘았다.’ 등이 반복돼서 지겨웠었다. 

그래서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잊었는데…. 

이토록 대단한 기록을 나는 그토록 쉽게 덮었구나!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기만 해서 맨송맨송해 별일 없던 날이, 장군에게는 얼마나 다행인 하루였을까. 글이 길고 감정이 깊이 이어지는 일기는 그만큼 힘들게 살아낸 하루였던 것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시대를 살며, 종이의 맨 위에 적는 그 날짜는 살아낸 것이다. 살아낸 그 날의 하루를 돌아보고 회의하며 다음날을 기약했으리라.(본디 일기는 그런 마음으로 적는 것이니까.) 그러한 마음이셨으리라. 


그보다 더 힘든 날은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셨던 걸까?

한 달씩, 몇 달씩 없는 해도 있다. 기록은 하였으나 일기를 찾지 못했던 걸까?




*
나 또한 일기를 쓴다.


살기 위해서 토로할 곳이 필요했다. 그런 일기를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지? 찾아보니 2004년 12월부터인가 보다. 사는 게 더 힘들 때 지나온 해 속의 오늘과 같은 날짜를 검색해서 읽어보았다. 지난 시간 속의 나는 더 힘들거나 그나마 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살며 버티고 있었다. 어떤 날이었건 나를 적었다. 그런 나의 고집스러움이 ‘나’다. 나를 말해주는 기록이 위로가 됐다. (거지같이 힘든) 오늘을 살아내는데 읽기의 효용을 깨달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쓰기 시작한 시점은 한참 후이다.


검색해서 기록이 없는 날의 ‘나’를 떠올릴 수 없었다. 검색을 해도 일기가 없는 날에 실망을 했다. 그날을 살았을 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망각의 동물이기에.

육체는 살아서 다음날을 이은 것이 분명하나, 삶을 의식했을 나는 없어진 것이다. 아쉽기 그지없었다. 일기의 효용성을 깨닫고는 매일 쓰기로 했다.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한 줄도 적을 게 없는 한심한 날이더라도 “한 게 아무것도 없음.”이라도 적기로 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을 지라도...

얼마나 한심한 시간을 지나왔는지 ‘오늘들’을 찾아볼까?



2008년 오늘에 나는 읽은 책을 타이핑하고 있었군.

2009년에는 교토의 대학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010년에는 ‘공부해야지’ 다짐하고 있는데 무슨 공부인지 내용이 없어서 기억나지 않는다.

2011년의 오늘은 귀국해서 한국살이를 시작했다.

2012년의 나는 없네.

2013년은 전날 몸이 안 좋아서 집에서 동영상 보고 놀기로 했다.

2014년은 논문 쓰면서 암 검사 등으로 병원 순례를 다니고 있었다.

2015년은 왜 없지?  

2016년은 36도의 무더위를 피해 역시나 도서관에 나왔다.

한의원 치료받고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다.

2017년에는 일단은 인터넷 연재하고 있었나 보군.

2018년은 이틀 만에 단편 하나를 써내고 뿌듯해 하네.

2019년에는 공모전에 보낼 수필을 고치고 있었나 보군.

2020년은 돈 벌 방법이 없나 고민하고 있네.

2021년은 팬데믹 세상을 실감하고 있다. 일본에 보낼 편지를 썼는데 일반우편은 불가능하고 23,000원 특송을 보내야 한단다. 평상시에는 500원이면 됐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보내지 못했다.


이 날은 꽤 우울했나 보다. 일과를 나열하고는, 이런 문구를 적어대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나라서 없어져 버리고 싶은데,

굳이 살아야 할 의미가 있다고 우기며, 

버티는 것이 얼마나 가상한가.”



2021년의 나는, 여전히 글도 제대로 못 쓰고, 돈벌이도 못 하는 인생을 산다. 그런 나를 ‘오늘의 삶그림’으로 버텼다. 매일 일기를 썼을 뿐 아니라, 2021년 12월~2022년 1년 간은 ‘오늘의 삶그림’으로 나를 남겼다. 1년 365일 매일 하나씩 그리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
잠깐의 감상을 적으려 했던 넋두리를 1시간이 넘도록 떠들어대고 있었네. (귀로는 지금도 난중일기를 듣고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의미하고, 징글징글해 보이는 삶인데...

이런 넋두리를 하다 보니,

이 얼마나 팔자 좋은 인생인가! 참으로 태평성대구나!


밥벌이의 쪼들림도 없이, 앞날을 위한 돈벌이의 압박을 느끼긴 해도, 온갖 핑계로 유예하며 그냥 산다.



일기로 인해 오늘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네.

이것이 일기의 효용성!


그리하여 나는 별일 없고, 별 볼일 없는 오늘을 적는다.






*  *  *

댓글은 지양합니다.

미숙한 글에 시간을 할애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송구한데,

이 이상의 시간과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네요.

저도 양심은 있는지라...


^^ 부디 좋은 날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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