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소에 오독하니 앉은 아이가 걸친 것 중, 제 몸에 맞는 것이 하나 없었다.
제 머리 위로 솟은 가방이 그랬고, 소매가 해진 옷으로 사지가 가려 있었다.
마구잡이로 결이 잘린 머리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밑창이 드러난 신발을 가지런히 한 아이는 하염없이 정류소를 지키고 있었다.
하루에 서너 번의 버스라 도착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지만, 아이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낼 법도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하는 광경들이 아이를 밀어나게 했다.
더 놀겠다 떼를 쓰다 제 부모의 손에 이끌리는 또래를 볼 때 아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처지를 바꾸어 보곤 했다.
잡아끄는 커다란 손의 온기를 상상하고, 그 손을 따라 부모의 얼굴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러나 아이는 상상을 길게 잇지 못했다.
사진으로 밖에 본 적이 없는 엄마아빠의 얼굴은 팔랑 종이처럼 얇디얇아서 아이를 금세 상상 밖으로 밀어내고 마는 것이었다.
아이가 기억할 만큼의 온기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에 젖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저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간 후에는 어떤 일을 할까? 맛있는 소시지 반찬을 만들어 주셨을까? 재밌는 이야기를 머리맡에서 들려주셨을까? 잠이 드는 귓가에 뭐라고 속삭여 주셨을까?
실랑이를 벌이며 이끌려가는 또래를 볼 때마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겠지.
‘많이 기다렸지? 오늘은 무슨 반찬 해줄까? 뭐라고 하셨을까?’
모르겠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질문을 건넬 수도,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억 속에 흔적조차 없는 이들을 그리워하기에 부족한 상상력을 탓하며 시간을 견뎠다.
그리움이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정류장에 홀로 남아 있는 아이의 마음 때문이다.
내리꽂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홀로 남아 있는 시간이 정체모를 그리움을 쌓여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