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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희 May 13. 2020

Memento mori, 그러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이것은 나의 노년 기획서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의 오후를 즐기자.
 
내가 처음 자의 반 타의 반의 은퇴를 하고 자유인이 되었을 때, 처음엔 이 자유롭고 편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총알같이 튀어 나가서 격무에 시달리다 밤늦게 돌아오던 일이 꿈만 같았다.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침대에서 과일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하고, 창가에 붙은 책상에서 책을 읽고, 친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하고 아니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제일 좋았다. 머리 쓰는 일 없이 멍하니 있는 것.
 
이런 나를 두고 주위에서 “처음엔 다 그래, 6개월만 지내봐” 하였다. 내가 그렇게 한 1년여 정도의 스트레스 없는 자유로움과 행복감에서 서서히 깨어나자,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어느 곳에도 속해있지 않다는 감정, 자유로움 이라기보다는 허전함 이랄가 가, 뭔가 내 일상을 조율하는 근거가 되는 중앙통제 시스템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즉 나의 일상에서 사회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취학 전 유년기를 지나면, 유치원이든 초등학교이든 학교라는 배움의 사회에 진입한 후부터 졸업 후에도 거의 줄곧 직장이든 자영업이든 어딘 가의 사회 시스템에 속해있는 일상을 유지하게 되는데, 은퇴란 그런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의 독립을 말한다.
 
이때 사람에 따라, 외로움, 소외감, 허전함에서부터 실망, 낙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게 되는데 많은 경우는 이 모든 것이 포함된 복합적 감정인 듯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이제는 모든 의무와 구속에서 벗어나 나만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자고 의욕에 넘쳐 있었다. 나는 이미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했으며 일반적인 사회적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는 이 상황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리라. 휴식과 자유 - 할 일을 모두 끝낸 사람에게 주어진 평화로운 시간이 내 앞에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살아 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리고 10년이 지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자, 내 앞의 생에 대한 강렬한 애착에 사로잡혔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인생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라고, 터널을 빠져나오면 이전보다 훨씬 더 환한 빛을 보리라고. 고통스러운 투병 기간이 지나자, 나는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에 대한 감사와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내 마음만을 위해 살기로 했다. 은퇴한 노년이라고 단순히 죽음을 기다리면서 무료하고 활기 없게 보낼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 진정한 나 자신만의 인생이 시작됨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오로지 즐거운 일만 하면서.
 
이것은 누군가에게 지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새날을 맞이하는 오늘 하루 ‘스스로에게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다짐이며, 남은 시간을 최대한 풍요롭고 생산적으로 보내기 위해 함께 배우고, 나누며, 같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게, 내일은 없을지라도. 

어느 날, 일기에 썼다
‘예순두 살, 첫 책을 펴내다’
 
노년의 꿈은 원대하거나 야심 찬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갈망하였으나 이룰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꿈은 이제 접어 내 인생의 소중한 보물 상자로 남겨두자. 꿈 인 채로 남겨져 있는 꿈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리고 나의 일상을 열정적이고 활기차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꿈을 갖자. 이미 많은 것을 이루고, 살아내고. 지나쳐왔으니 이제 더 이상 무언가 커다란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꿈을 갖자. 꿈은 작고 일상적이며 원대하지 않을수록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호스피스 병동의 많은 환자들이 마지막 날에 회상하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은 아주 작은 일상의 행복이었다고 한다
 
책 쓰기를 시작할 때 단연코 책을 내리라고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지만, 사실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것도 아니었다. 건강도, 일상의 잡사도, 개인적인 많은 어려움으로 몸도 마음도 힘든 때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자료를 모으고 글쓰기를 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점차 그 모든 현실의 어려움에서 초연 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나만의 비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다. 글쓰기가 되든 안 되든, 진도가 나아가던, 막히던, 그냥 조금씩 읽고 써 나갔다. 그러면서 지난날을 회상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울고 웃고 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나름의 기개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 남겨질지라도,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의연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담대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늙음을 한탄하지 말자
재물에 연연하지 말자.

있어도, 없어도, 그런대로 자족할 수 있다.
세상에 감사하고, 불평하지 말자
부족한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준 모두에게 감사하자
그리고 그 사랑을 돌려주자.
그 길을 찾는 것이 남은 삶을 채워줄 나의 꿈이다.
 


 
이것은 내가 5년 전에 쓴 글이다. 그리고 이 원고는 그동안 노트북 안에 잠들어 있었다.
얼마 전, 아무 예감도 없이 다시 노트북을 열어 원고를 꺼냈다
그리고 일기장에 썼다.


예순일곱, 첫 책을 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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