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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희 May 30. 2020

살아있는 날들의 행복

나의 투병기


50즈음에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피곤하고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 뒀다. 아쉬웠지만 예전의 열정도 좀 식었던 때라, 잠시 간의 휴식 후 또 다시 언제고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만두고 쉬면서 여행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설렜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의 즐거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 3개월 여행도 하고 쉬면서, 어느 날 건강검진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예감도 없이 간 검사결과에서, 의사는 내게 유방암이라고 했다. 의사는 젊고 확신에 차 있었으며, 내 자격지심 이었겠으나, 마치 물고기를 낚아 올린 낚시꾼의 표정이었다. 그 때만 해도 주위에 암환자는 드물었고 나는 막연히 암 걸리면 거의 다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물었고 그는 여러 설명들을 한 것 같다. 5년에서 7년 사이에 재발이 많다고, 대충 계산해보니 – 그 와중에도 – 확률에 의하면 10년 이상 살 가능성은 15~20%정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10년안에 죽을 확률이 80프로가 넘는다고?


그는 그 자리에서 입원을 하고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2달동안 온갖 상상과 공상으로 불면의 밤을 지낸 후에 다른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내 생애 최고의 의사가 되어주었다. 사람의 생사는 의술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6개월에 걸친 수술과 항암, 방사선의 풀세트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신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달 했었던 것 같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놀랄 만큼 많은 환자들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있었다. 50~60대 환자들도 많았으나, 30~40대도 많았다. 20대는 성격상 따로 모인다는 얘기를 들었다. 순간, 나는 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한창 꽃처럼 피어난 가슴에 나이키 로고를 새기고( 지금은 복원 수술이 일반화 되어있다), 그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자신의 처지를 떠나, 연민으로 목이 메었다.


그곳의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던 한 20대 커플은 우연히 유방암 확진을 받았다. 그들은 곧바로 수술하고 앞당겨 결혼했다. 여자 쪽도 당당했고, 남자도 의연했다. “병은 병인 것이고, 치료해서 나으면 되는 것이다‘ 했다고. 20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했을까? 그 나이는 순수한 나이다. 믿는 대로 행동한다. 노년에도 그것은 가능하다. 순수하지는 못할지라도, 육체의 한계와 편견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아는 나이. 진정한 인간의 품위를 이해하는 나이.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숭고함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 드러난다고 믿는다. 그것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나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매달 한 번씩 만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비슷한 나이의, 내 집 근처에 사는 친구 몇을 만나게 되어 기뻐하고 있었다. 우리는 매달 모임에 카풀을 하여 함께 다니면서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모임에 나갈 때 마다 우리는 누군가가 재발 했다거나, 새로이 환자가 되어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한 자매의 일 이었다. 그 자매는 아마도 유전적 내력이 있었는지, 자매가 함께 환자였다. 언니가 진단을 받자 동생도 따라 검사한 결과였다. 그 당시 언니도 40이 넘지 않은 젊고 아름다운 자매였다. 특히 언니의 미모는 평범한 가정주부라기엔 너무나 매혹적인 젊은 여자였다. 동생은 더 젊었으나 다행히 아주 초기에 발견되어 – 언니의 경우가 도움이 되어- 다행이라고 하였는데, 언니는 재발의 걱정이 많았던 듯 했다. 몇 달 후 그 자매의 언니는 재발된 것을 알았고,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얼마 후 그녀 동생의 SNS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저녁이 되니 집마다 등이 하나 둘씩 켜지네요. 내 마음에도 저리 쉬이 등불이 환하게 켜질 수 있었으면.. “


그런 이유로 나는 점차 안 나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가까이 살던 친구에게서 함께 가자고 전화가 왔다. 결국 나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는데, 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재발했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는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안보고 안 듣고 죽음이라는 단어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내가 무슨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도망쳤고 다시는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게 되어 새벽에 공항버스를 타려고 집 근처 정거장에 도착했다. 짐을 내리고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서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리는 그곳에서 실명이 아닌 카페닉네임으로 서로를 호칭하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 불린 것이다. 그였다! 그녀의 이름은 ‘지금부터’ 였다.


지금부터님! 암에 걸리고 나서 지금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뜻에서 지은~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였고 1주일간의 유럽여행을 떠나는 길이라 했다. 나는 마음에 집히는 생각이 있어 아무 말도 못하고 목이 메었다. 함께 다닐 때 그녀는 불문학이 전공이라 했다 그리고 언젠가 파리를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었다. 공항에서 우리는 악수를 나눴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후로 나도 그도 서로 연락이 없었고 1년쯤 지나 그녀가 그 여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더 살고 싶어~ 아들 결혼도 시키고“ 했다고. 50중반의 젊은 나이였다. 나는 그녀에게 사소하지만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회한과 자괴감으로 나는 통곡했다.


그로부터 10여년후 나는 재발 판정을 받았고, 두번째 수술을 했으며, 그 얼마 후엔 다른 유방암환자들을 위한 멘토로 활동하기도 했다. 나의 두 번에 걸친 투병 경험과 무엇보다 20프로의 확률을 넘어 또 다른 10년을 향한 생존 기록을 그들과 나누고 싶었었다.


그 후로도 수년이 지난 지금, 나는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고, 2번의 골절 수술도 받았지만 아직 살아있고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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