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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도 사람이다 Nov 27. 2024

하얀 눈, 곰 한 마리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첫눈

집으로 돌아왔다.

숨이 찬다.

기도 찬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다 즐긴 커피잔이 담긴 쟁반을 정리하고 나오기 직전이었다.

함박눈이 예쁘게 내리고 있었다.


나름의 준비를 마치고 기분 좋게 나왔더니 현실은 눈보라가 친다.

눈 때문에 눈이 안 떠진다.

겨우겨우 장갑을 낀 채로 얼굴만 급하게 가렸다.

우산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반절은 도착했다.

엄청난 양이다.

급한 대로 다른 아파트 내에 정자로 향했다.

벌써 고드름이다.


하필이면 모자도 없는 외투를 골라서 고생이다.

아침에 아들 녀석과의 눈놀이, 나의 동심은 파괴되었다.

뭔 첫눈이 이렇게 살벌한지, 전쟁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려다 발견한 눈덩이가 눈앞에 아른아른, 조용히 집어다가 나 혼자 초스피드로 사부작사부작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무도 없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집 앞에 거의 다 도착하니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돌아다닌다.

슬슬 체면을 생각한다.

조용히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만 감싸고 후다닥 아파트 정문을 통과한다.

눈사람은 귀엽기라도 하지, 나는 눈을 하도 맞았더니 옆에 콜라만 끼고 있으면 어울릴 백곰이다.


1층 공동현관을 들어서기 직전, 펄쩍펄쩍 뛰어 옷이며 운동화까지 다 털어내고 아무 일 없던 듯이 차분하게, 도도하게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열리는 순간 이웃 아저씨가 흠칫 놀라신다.

너무 가까이 붙어있었나?

미소를 띤 모습으로 다소곳하게 인사하며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 망할.

분명 털어댔는데.. 다 털어버렸는데 어찌 된 일일까?

거울 앞에 다시 나타난 백곰이다.

놀라실 만도 다.

상상과 현실은 참 다르다.

분명 완벽하게 잘 털어냈다고 생각했다.

조신하게 인사한 곰 한 마리라..

고맙다. 첫눈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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