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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08. 2019

나를 울린 아이의 한 마디

아는 분의 딸 A가 초등학교 고학년인데 학교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심하게 당해서 무척 힘들어합니다. 사람 둘이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거 얼마나 쉽나요? 여럿이서 교묘하게 따돌리면서 사람 말라죽게 만드는 거, 이거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데 A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생각하면 남일 같지 않고 마음이 아픕니다. 저희 큰아이도 몇 년 전에 비슷한 일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분은 학폭을 여느냐 마느냐, 머리 아프고 힘든 상황이라 저와 통화하며 이런저런 의논을 했지요. 큰아이는 옆에서 같이 걸으며 제가 통화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더군요. 통화를 끝낸 저를 보고 아이가 말했습니다.




"A가 힘들긴 할 거야. 그런데 시간이 해결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줘."

"그렇긴 하겠지. 그래도 어디 엄마 마음이 그러니? 같이 밥 먹을 애도 없나 본데."

"그냥 혼자 다니는 상태인 거지? 나는 그 정도가 아니었어...... 대놓고 면전에서 애들이 나 싫다고 그랬어."

".......(사실 좀 놀랐어요. 막연히 따돌림을 당하는 줄 알았지, 그 정도인 줄은 몰랐거든요.)"

"그때 난 생각했어. 그래, 내가 니들보다 훌륭하게 될 거다, 그런 생각으로 버텼어."

"선생님한테 얘기 안 했어?"

"선생님? 고자질하면 더 심하게 당할 게 뻔한데 어떻게 말해?"

"아유, 그래.(그 당시 저 또한 우울하고 힘든 상태라 아이가 어떤 상황인지 세심하게 못 챙겼던 것 같아요.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죠.) 요즘들은 왜 그러냐. 왕따니 학교폭력이니. 이꼴 저꼴 안 보려면 홈스쿨링이라도 해야 하나."

제 말에 아이가 웃으며 말하더군요.


"이꼴 저꼴 봐야 어른이 되지. 온실 속에서만 살면 어른이 되겠어?"


아무렇지 않게 같이 웃었지만 사실 목이 메었어요. 어릴 때부터 예민한 기질 때문에 저를 힘들게 해서 참 미움을 많이 받은 큰아이. 순둥순둥 한 작은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제가 그 애를 얼마나 구박했는지 모릅니다.


안 쓰는 핸드폰을 정리하다 우연히 큰아이가 초등 1학년 때 저와 통화한 파일이 있길래 들었는데, 다 듣고 나서 핸드폰을 붙잡고 혼자 울었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1학년 보니 정말 아기 같아 보여요. 저렇게 어린데, 아기인데, 예뻐만 해도 모자란데.... 그 작은 아이랑 통화하면서 제가 얼마나 모질게 다그쳤는지, 엄마의 기세에 눌려 말도 제대로 못하고 기 죽은 아이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앳된지.  정말 계모도 이러진 않았겠다 싶었어요.(계모에 대한 일반화나 비하는 아닙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이 그랬다고요.)


나 사는 게 힘들고 지친다고 그 어린애한테 이토록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냈었구나 싶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아이가 감당했을 외로움이나 서러움을 오랜 세월 지나서야 겨우 가늠하는 모자란 엄마. 그런 엄마 밑에서도 참 잘 커서 미안하고 고마웠어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예로부터 관용적으로 내려오던, 마음과 관련된 표현들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마음이 찢어진다, 기가 막힌다, 속이 상한다, 가슴이 아프다, 가슴에 피멍이 든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말들을 몸으로 체험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큰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가을 하늘이 너무 예쁘다며 핸드폰으로 사진 찍겠다고 오솔길 한가운데로 뛰어갔습니다.


첫째인 아이에게 엄마는 영원한 초보엄마일 텐데 그래도 제 나름의 생명력으로 잘 크고 있는 걸 보니 감사하기도 하고 너무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엄마도 아이와 함께 크는 거겠지, 스스로 위로도 해봅니다.


아이가 셔터를 눌러대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정말 가을이 왔다 싶네요. 한참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도, 아이를 키우며 뒤늦게 어른이 되어가는 엄마에게도,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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