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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03. 2019

엄마표가 사교육보다 위험해지는 순간

  

아이가 서너 살 때였던 것 같아요. 푸름이니, 책 육아니 이런 세계를 알게 된 시점이. 하긴 그 이전에 이미 아기에게 책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에서 귀 따갑게 들었지요.     


돌쟁이 아기 엄마들에게 프뢰벨 영업사원 아주머니가 50만 원이 훌쩍 넘는 교구와 전집 세트를 팔러 다니시며 ‘어릴 때부터 책을 접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나중에 삶의 질이 다르다’고 열강을 하셨죠. 지금도 적은 액수가 아니지만 벌써 10년도 더 전이니 돌쟁이 아기 앞으로 쓰기엔 큰돈이었건만 엄마들이 선뜻 잘들 사더군요. 저는 다 상술일 뿐이라고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내가 그 액수가 부담스러워 못 사는 건 아닐까, 스스로 주눅도 들었습니다.     




딴에는 소신 있는 엄마라서 흔들리지 않 거라고 자부했지만 아이가 좀더 큰 다음,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책 육아’의 세계를 접하니 어서 빨리 전집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초조해졌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책 육아는 신세계였습니다. 엄마가 책만 열심히 읽히면 아이 인성도, 사회성도, 학습 능력도 보장되고 나아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준다니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게 엄마표 독서에 발을 들이면서 알게 된 엄마표의 세계는 무궁무진했습니다. 엄마표 영어, 엄마표 수학, 그 외 온갖 엄마표 예체능까지.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남편 따라 낯선 곳으로 와서 만날 사람도, 성취감을 느낄 만한 일도 없는, 그렇다고 박차고 나가서 일을 할 수 있게 아이를 믿고 맡길 사람도 없는, 이래저래 온통 ‘없는’ 것 투성이인 나날에 지쳐가던 저에게 엄마표의 세계는 새로운 에너지원이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인터넷을 뒤지며 자료를 다운 받아 오리고 붙여서 엄마표 학습지도 만들고 엄마표 활동 계획도 세우며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사소한 반찬거리 하나 사면서도 기왕이면 더 저렴하고 양 많은 걸 챙기는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아이 전집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정 안 되면 중고라도 사들였습니다.     


아이는 곧잘 따라왔고 어디 가서 ‘우리 아이는 책을 참 좋아해요. 날마다 책 읽어달라고 졸라요. 밤에도 책 읽느라 잠을 안 자요. 책을 읽으며 다양한 활동도 즐겁게 해요’ 같은, 인터넷에서 본 다른 엄마들의 자랑을 비슷하게 말하고 다닐 만큼 책을 좋아하고 잘 읽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인데 그때 자랑하고 다닌 거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내친김에 아이 친구들까지 묶어서 책도 읽고 읽은 다음에 다양한 주제를 갖고 이야기도 나누고 연극도 해보고 미술 놀이까지, 정말 그 당시 사진을 보면 요즘 뜨는 웬만한 엄마표 파워블로거들 못지않게 열성이었지요.      

이렇게 책도 좋아하고 제가 공을 들였으니, 학교 가서는 저를 안내했던 많은 책들에서 예고한 대로 아이가 두각을 드러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이는 친구들 사귀는 데에도 서툴렀고 참관수업에 가서 보니 1학년인데도 딱 부러지게 발표를 잘하는 아이들도 많던데 우리 아이는 상대적으로 어리숙한 것 같았어요. 지금쯤 아이가 되게 똑똑하다고 주변에서 ‘엄마가 어떻게 키우셨냐’고 물어보고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안 일어나더군요. 하다못해 그리기 대회, 글짓기 대회에서 상 한 번을 못 탔어요.     



내 커리어를 다시 이어나갈 생각도 접고 몇 년간 공을 들였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슬슬 아이가 미워 보였어요. 다른 애들은 이렇게 엄마표로 해주면 아웃풋이 팍팍 나오는데 얘는 왜 안 나오지? 답답해 보였어요.

안 그래도 복잡한 마음인데 비슷하게 엄마표를 해온 어떤 엄마의 아이는 학원 근처도 안 갔건만 영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잘 한다고 하더군요. 그 아이의 언니도 학교에서 유명한데, 동생까지 뛰어나다며 그 엄마 주변은 늘 엄마표 교육 비법을 전수받고 싶은 엄마들이 에워싸고 있었어요. 그때는 그게 왜 그리 멋져 보이고 부럽던지요. 엄마표의 대가로서 아이에게 많은 성취를 이루게 한 엄마들이 위대해 보이는 만큼 나는 더 초라해졌고 내 아이는 더 작아 보였어요.     




그렇지 않아도 심난한데 아이는 학교에 들어간 이후 짜증이 늘고 ‘누가 안 놀아준다’ ‘선생님이 뭐라 했다’ 어쩐다 저쩐다 하며 자꾸 하소연을 했어요. 돌이켜보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아이도 힘들었던 건데 저는 ‘책 육아와 엄마표 학습으로 공들인 보람도 없구나’라는 자기 연민에 빠져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데 인색했습니다.     


엄마표를 더 진행하냐, 마냐의 갈림길에서 혼란스럽던 어느 날, 우연찮게 엄마들이 ‘추종’하던, 앞에 언급한 엄마표 영어를 하는 분 집에 놀러 가게 됐어요. 사방 벽면에 빽빽하게 가득 차 있는 어마어마한 영어책이나 의외로 살림은 엉망으로 하는 그 엄마의 털털한 면에도 놀라긴 했는데요, 오랫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한 건 장식장에 놓인 그 아이의 그림이었어요. 솜씨는 별로 없어 보이는 평범한 그림이었지만 가족 넷이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짓고 다 같이 손을 잡고 있었어요. 그림 하단에는 ‘정말 정말 행복한 우리 가족’이라고 쓰여 있었고요.  

   

아... 이 아이는 정말 행복해 보여.     


저는 늘 아이를 위해 프로그램을 짜고 계획한 대로 아이와 다양한 활동을 하느라 바빴어요. 그래서 아이가 ‘놀아 달라’고 하면 화가 났죠. 지금까지 놀아준 건 뭔데? 엄마가 이렇게 애써서 유익한 프로그램으로 놀아줬는데 뭘 또 해달라는 거야? 엄마 몸 으스러져라 준비해서 친구들 불러서 간식까지 먹여가며 너를 위해 시간과 노력과 돈을 썼는데 자꾸 뭘 해달라는 거야?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아이가 진짜 원하는 걸 해주는 건지, 내 욕심에 뭔가 하고 있는 건지. 아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자리까지 내가 빼앗아서 내 방식대로 채워주고 있었던 건 아닌지. 무엇보다 아이가 행복한지를 고민하지 않았어요.    

 

제가 넋을 놓고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그분이 제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죠.     


“별로 잘 그리지는 못했죠? 저희 애들이 그림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데 본인이 즐거워하니 다행이죠. 집도 너무 엉망이라 앉을 데도 없어서 미안하네요. 제가 워낙 정리를 안 해요. 오죽하면 시아버지가 오셔서 애들 정신병 걸리겠다고 정리 좀 하고 살라고 하셨겠어요. 그런데 뭐 애들이 놀면 금세 어지럽혀지는 집을 왜 자꾸 치워요? 그냥 편하게 살지.

전 공부도 편하게 시켰어요. 큰애는 지금 초등학교 고학년인데 미국 갔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 사는 애들보다 영어를 더 잘 하냐고 놀라워했죠. 어떻게 했냐고요? 영어책 열심히 읽어주고 그랬죠 뭐. 대략 잡아도 1000권은 넘게 읽어준 것 같아요. 남들은 책에 딸린 CD를 들려주라고 그러는데 우리 아이는 CD 듣는 걸 너무 싫어해서 제가 다 읽어줬어요. 그래서 발음이 구려요. 하하하.”     


낙천적이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 엄마의 큰아이는 고학년이 된 후, 전교에 소문이 날 만큼 영어도 그 외 학습도 다 뛰어난 아이가 되었지만 저학년 때는 뒤에 나가서 벌을 설 정도로 산만하고 집중력도 없는 아이였다고 해요. 하지만 시간이 해결할 문제를 갖고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며 웃는 그 엄마를 보니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이에게 실망하고 조바심을 내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습니다.


난 엄마표로 공부시키면 안 되는 사람이야.     


엄마표로 무언가를 하는 분들..... 이렇게 책을 읽히고 엄마표로 다양하게 가르치면 엄마랑 사이도 좋아지고 그래서 훗날 아이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될 거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고 계시나요? 내 시간과 커리어를 희생하고 노력한 만큼 아이가 그 보상을 해 줄 거라고 내심 흐뭇해하고 있나요? 엄마표로 학습시켜서 반듯하게 잘 큰 아이들의 사례를 보고 우리 아이도 그럴 거라고 상상하고 있나요?     


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엄마의 어떤 욕망이 투영되기 시작하면 둘 다 불행해집니다. 아이와 책을 읽고 영어 공부를 하고 함께 독후활동을 하고... 그 모든 시간이 그 자체로서, 현재의 소중함으로서 온전히 의미를 지닌다고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엄마표가 사교육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노력한 만큼 아이가 아웃풋을 보여주지 않아도 실망하기보다는 아이와 보낸 시간 자체에 의의를 둘 수 있는 엄마가 아니라면, 섣불리 시작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습니다.     


그날 전 깨달았어요. 낙천적이어서 느긋하게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엄마가 아니라면 차라리 아이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교육 종사자 분이 낫다는 걸요. ‘이렇게 해줬는데 왜 너는 안 되니?’라는 닦달을 학원 선생님이 하면 지나가는 꾸중이지만, 엄마가 하면 아이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될 테니까요. 그렇게 몇 년간 계속해 온 저의 엄마표 교육은 차츰 시간을 줄이는 걸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얼마 전에 아이의 중간고사였어요. 한때 교편도 잡았고 학원 강사도 했던 저였지만 웬만해서는 시험 때 아이의 국어 공부를 봐주지 않았어요. 제가 콕 찍어준 문제를, 학원에서 가르쳤던 아이가 틀리면 그저 안타깝지만 제 아이가 틀려오면 너무 화가 났거든요. 이제 저도 예전보다는 정신 수양(?)을 좀 했고 아이도 제법 커서 엄마가 봐주면 무척 고마워하고 열심히 해서 약간은 봐줍니다.


시험 끝나고 와서 아이는 엄마가 중요하다고 했던 내용이 시험에 많이 나와서 잘 본 것 같다며 고맙다고 웃네요. 참 잘 웃고 속도 깊은 아이. 이렇게 잘 컸을 아이를, 겨우 초등 1학년 때 모습을 갖고 멋대로 판단하고 깎아내린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그때 엄마표를 멈춘 제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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