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랑하늘 Aug 06. 2024

프롤로그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남편과 살고 있다

남편이 갑자기 방문을 열고 반가운 얼굴로 들어오며 묻는다. “뭐해?”

나는 황급히 문서창을 내리며 다급하게 말한다. “아니야. 들어오지 마.”

또다. 남편은 내가 딴 일을 한참 할 때는 잠잠하다가 글만 쓰기 시작하면 귀신같이 알고 방문을 열며 나타난다. 어떻게 매번 그럴 수 있는지 진실로 놀랍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 까지는 남편에게 알렸지만, 미완성의 글을 보여주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나는 나와 남편,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와 그는 햇수로 따지면 어느새 6년을 함께 하고 있는데, 그 시간 동안 갈등이 있었던 적은 있지만, 그것이 심한 싸움으로 번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가끔 가볍게 술을 마시며 기분 좋은 대화를 할 때나, 아늑한 카페에서 여유로운 대화를 할 때, 혹은 집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편안한 대화를 할 때면, 우리는 어김없이 서로에게 "우리는 왜 계속 잘 지내지?"라고 물으며 신기해하고, "덕분에 계속 잘 지낼 수 있어서 고마워."라고 말한다.

나와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아 ‘혼자 살아야 하나?’ 고민했던 우리가,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말하면 ‘힘들겠는데? 그냥 혼자 살아.’라는 피드백을 받던 우리가, 한 집에서 이상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은 어떤 힘을 어떻게 만들어 낸 걸까?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로 가만히 두기엔 아쉬워 글로 남기기로 결심했다.      


내가 30대 후반, 그가 20대 후반일 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독서’와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겹쳐 처음부터 대화가 잘 통했지만, 나이 차이가 8살이나 난다는 걸 알고 나서 더 이상 가까워지기는 어렵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연락과 만남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가느다란 실처럼 드문드문 연결됐고,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만나 수다를 떠는 친구가 되었다.

친구라 부르지만, 속으로는 그를 ‘기간제 친구’로 여겼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때까지만 이어지는 그런 잠정적인 관계. 그는 연애를 원했고, 나는 연애보다 부담 없이 편하게 만나는 그런 정도의 관계가 더 좋았다. 나는 돌싱이었고, 그는 미혼이었다. 그는 특별한 경력 없이 그냥저냥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백수였고, 나는 별다른 계획 없이 퇴사를 앞두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여러 모로 우리가 연애를 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만나다 보니 각자의 이유로 호감이 커져 결국 사귀어보기로 했다. 다만, 기존의 시작과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만나는 것에 서로 분명히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연애의 끝에 헤어짐을 선택지로 둔다는 건 연애에서 모순적 태도를 낳는다. 헤어질 수 있으니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면서도, 같은 이유로 그 연애에 오롯이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꽤 오랜 시간, 나는 항상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를 만났다. 오늘 헤어져도 후회하지 않으려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려 했고, 나와 함께하는 동안 그 역시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좋은 사람을 더 좋은 사람으로'. 실제로 이 문구는 한동안 내 카톡 프로필에 적혀 있기도 했다. 이런 마음 때문인지 우리는 연애 초기부터 합이 참 잘 맞았다.

교제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까, 그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언어재활사가 된 나와 ADHD를 가진 그, 매너리즘에 빠져 슬럼프를 겪으며 일에서의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나와 그럴싸하게 이뤄놓은 성과는 없었지만 성장에 대한 열망만은 가득했던 그. 게다가 우리는 둘 다 '매우 예민한 사람(HSP)'이라는 보편적이지 않은 기질을 공유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이미 최고의 짝꿍이 될 만한 가능성을 짙게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결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답을 미루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일을 함께 겪었다. 편안하고 즐거운 데이트, 사소한 갈등, 나의 번아웃과 우울증 재발, 그의 사업 시작과 ADHD 진단 등등. 그러다 결정적으로 데이트를 위해 마련한 원룸 아지트에서의 시간을 통해 드디어 나도 결혼에 대한 결심이 섰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하며 느낀 편안함과 역할 분담에 따라 자신이 맡은 집안일을 불평 없이 묵묵히 해내는 그의 모습 덕분에, 그와 같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이 싹텄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더 좋은 사람으로'. 나는 아직도 처음의 그 마음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런 마음으로 그를 대하고 있다. 내 곁에서 그가 원하는 모습에 최대한 가까워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고 행복해지기를 소망한다. 만약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된다면 그걸로 됐다. 아마도 이러한 마음이 사이좋은 부부의 근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2019년 초봄에 남편을 친구로 만났고, 그 해 늦여름에 연인으로 받아들였으며, 2022년 아름다운 봄날에 배우자로 맞이하여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오늘도 글을 쓰려고 문서창을 연다. 그리고 어김없이 같은 대화가 반복된다.

“뭐해?”

“아니야. 들어오지 마.”  

아무래도 글을 쓰기 전 방문에 안내판을 붙여놔야겠다. ‘집필 중’이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