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

결국엔 사랑이야.

by 살비

체념은 심리학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라고 한다.

감정이나 욕망을 의식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포기하는 태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건강한 체념도 있다고 생각했다.


욕망/질투 - (충분한 인식과 고민) - 체념/정리

이 과정을 거쳐

"그건 나의 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느낀다면, 감정이 고요해지고,

다른 욕망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로 이동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건 체념이 아니라 수용의 진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Separation 1894.jpg Edvard Munch – Separation


심리학이 ‘전진’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유

왜 심리학은 "앞으로 나아감"을 치유로 보고,
"멈춤"은 부정적으로 볼까?


1. 심리학의 뿌리는 '치유의 흐름'이다

심리학은 사람을
고통 → 인식 → 회복
이라는 선형적 모델로 본다.


아픔이 있다.
그 원인을 알게 된다.
그것을 넘어서 삶을 회복한다.


이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곧 치유다.
따라서 멈춤은 정체 혹은 퇴행으로 간주된다.


2. 서구의 시간관: 선형성과 진보

서양 철학과 과학은 시간과 존재를 직선적(linear)으로 본다.
즉 과거 → 현재 → 미래
변화, 진보, 발전이 곧 ‘살아 있음’의 증거처럼 여겨진다.


변화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멈춘다는 건 정신의 죽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3. 기능 중심의 심리이론들

행동주의나 인지치료는 행동과 기능을 중심으로 좋음/나쁨을 판단한다.
예: 우울감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 움직이지 않게 만든다 → 기능 저하.


그래서 움직이지 않음 = 심리적 고장
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멈춤은 정말 나쁜 걸까?


이건 시선의 차이다.
동양적 관점에서는 정반대의 의미가 된다.


동양의 시간관은 선형이 아니라 순환적이다.
멈춤은 곧 무(無)이며,
그것은 생성의 시작이다.


명상, 침묵, 무위(無爲), 공(空)...
이 모든 것이 가장 깊은 회복의 형태로 여겨진다.


현대 심리학도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이렇게 말한다:

“전진만이 회복이 아니다.”

“멈춤도, 후퇴도 회복일 수 있다.”

그 흐름을 보여주는 심리학 개념들:

자기 연민 (self-compassion)

마음챙김 (mindfulness)

수용전념치료 (ACT)


이들은 ‘지금 여기’의 감정과 멈춤을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한다.



정리하자면,

심리학은 고통을 줄이고 삶을 회복하려는 학문이기에
‘나아감’을 치유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진짜 치유는 멈춘 자리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GUSTAV KLIMT - The Kiss.jpg Gustav Klimt – The Kiss

체념이라는 노래, 그리고 감정의 통합


체념이라는 단어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바로 이영현의 《체념》이다.


가수 거미에 따르면,
이영현은 대학 시절 연인과 헤어진 뒤
3일 동안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시간 동안 만든 곡이 바로 졸업 과제곡이었던 ‘체념’이다.


이 노래는 실제 마지막 통화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그 상대는 이영현과 53일간 사귄 연하남이었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이영현’ 항목)


노래 가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행복했어 너와의 시간들 → 회상, 감사

왜 말 안 했니 → 슬픔, 분노

시간 돌릴 수 있다면 → 자책, 간절함

그래, 더 이상 묻지 않을게 → 체념

행복하길 바래 → 이별의 수용

내 마지막 사랑은 돌아선 너에게 주고 싶어서
→ 집착 없이 보내는 사랑, 깊은 감정의 통합


→ 감정의 순서:
회상 → 슬픔 → 자책 → 체념 → 수용 → 통합


나는 생각했다.
상대를 보내주는 이 체념의 과정이,
오히려 사랑의 대상이 나에게로 전환되는 일이 아닐까?

OIP1.jpg Jean‑Baptiste Greuze – The Broken Pitcher
체념이란 건 결국,
내 바깥에 있던 욕망과 기대, 감정이라는 ‘대상’을
내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여 ‘정리’하는 과정이다.


욕망, 기대라는 사랑의 감정이
이해와 정리를 거쳐
다시 또 다른 사랑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것.



결국엔 사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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