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귀향
1. 귀향
식당이나 다방, 요정 등 유흥업소에는 수시로 종업원들이 들락거리게 마련이다. 스스로의 문제로 자리를 옮기거나 그만두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소개소의 직원들이 이리저리 사람을 돌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종업원들이 자주 자리를 옮겨야 소개비 수입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소개소 소장의 말을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이화장에서 나와 주덕 사거리에 있는 국밥집에서도 일을 했고, 음성 시내에 있는 요정에서도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언제까지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공부를 다시 할 수 없으니 기술이라도 배워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해서 찾아 들어간 곳이 붓 만드는 공장이었다. 모든 공정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노동집약적인 곳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붓에 쓸 털을 정돈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세탁을 해서 뒤엉켜 들어온 털을 나무판에 깔고 날카로운 판자로 앞뒤로 저어서 털의 머리와 뿌리를 구분했다. 조금 능숙해지면 나무판자로 털을 저으면 짙은 머리 부분이 선명하게 나타나면서 분리가 됐다. 분리된 털을 모아서 한 주먹에 쥐고 빗으로 빗겨주면 윤기 나는 머리와 뿌리로 구별되었다. 그것을 고무줄로 묶은 다음 뿌리 쪽에 접착제를 발라 고정시키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털을 용도에 따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실로 묶은 다음 접착제를 발라 대나무나 플라스틱 자루에 끼우면 붓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조별로 긴 탁자에 늘어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전후반의 젊은이들이었다. 남자들은 물건을 옮기거나 포장하는 거친 일을 했고 여자들은 털을 고르고 빗어서 다듬는 일을 주로 했다. 대부분이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감독 격인 주임의 감시가 대단했다. 단체생활이란 것이 항상 시끄럽고 사고가 잦기 마련이었다. 말썽을 부리는 자는 어디론가 끌려가 매를 맞거나 공장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렇게 세월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새 그의 나이가 17살이 되었다. 나이가 차서 주민 등록을 해야 했으므로 집에 연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야단 한 마디 없었다. 외지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랬다. 그는 부모의 희망에 따라 그 해 봄,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가출을 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정규학교에는 다시 갈 수 없어, 여수동에 있는 미인가 학교에 들어갔다. 공민학교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이긴 하나, 졸업해도 학력이 인정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봐야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그는 중학교 2년을 다닌 것이 인정되어 3학년으로 편입해 들어갔다. 그리고 5개월 후인 그 해 8월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3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를 공부에 매진하게 했다.
모란은 서울로 통하는 절묘한 입지와 모란 5일장으로 인해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농촌의 농작물이 올라오고 수도권 시민들의 소비로 연결되면서 모란 5일장은 유명소가 되었다. 그로 인해 모란시장 주변은 도로가 넓어지고 건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하는 시간을 빼고는 아버지가 하는 소 키우는 일을 도왔다. 여수동이나 탄천 너머의 고등동에서 소에게 줄 여물을 해오는 일이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정규 고등학교를 가는 게 어려워 보였다. 이미 동생 셋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그마저 학교를 갔다가는 부모님이 더 힘들어질게 뻔했다. 그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공부할 수 있는 야간학교를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그의 아버지가 경찰서에 다니는 차순경과 친했는데, 그에게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는 일자리를 부탁했다. 적어도 4시 정도엔 학교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모란 파출소에서 사환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5시에 퇴근이었으나, 그의 사정을 봐서 4시에 퇴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파출소의 사환은 그야말로 심부름꾼이었다. 청소와 순경들의 심부름을 해주고, 아침에는 정기적으로 경찰서에 서류를 전달해 주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사환을 하면서 다닐 수 있는 야간학교는 많지 않았다. 각 지방마다 기술을 가르치는 전수학교나 고등공민학교가 있었지만, 성남에 있는 전수학교들은 워낙 유명해서 그는 가기를 꺼렸다. 험한 분위기의 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서울에 있는 미술학교였다. 야간부가 있었고, 6시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10시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거의 통금시간이었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