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인관관계에 지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한때 푹 빠진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나의 해방일지>다. 관계에 치여 지쳐버린 주인공 염미정은 사내 동아리 ‘해방클럽’을 만들어 해방일지를 쓰게 되는데, 그녀가 쓴 해방일지가 마음에 들어 대사를 적고,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실망스러운 것도 있고, 미운 것도 있고, 질투하는 것도 있고, 조금씩 다 앙금이 있어요. 사람들하고 수더분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론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가 아닐까.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려진 느낌에 시달리는 이유 아닐까.
<나의 해방일지> 제5화중
지금의 나는 온전히 좋아하는 마음을 타인에게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거 같다. 남이 봤을 땐 그럭저럭 관계를 잘 가꾸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나는 관계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했다. 특히, 입사 이후 이런 고민은 커졌는데,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꽤 많이 신경 써 집에 오면 일이 아닌 사람에 대한 내 예민한 반응으로 녹초가 되곤 했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으로 초고를 썼으나, 썼다 지웠다를 꽤 반복했다. 그만큼 시간이 흘러 글을 오래 묵혀버렸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감정처럼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들쑥날쑥 바뀌고 말았다. 어느 날에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마냥 좋고, 이 관계가 쭉 오래갈 거라는 벅찬 기대감을 품었다가, 다른 날에는 사람은 역시 혼자 살아야 한다며, 퇴근길 걸음을 재촉하고 최대한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했다.
순식간에 이렇게 변한 건 아니었다. 서서히 사람과의 관계가 피곤해진 탓도 있고, 회사가 지방에 위치하다 보니 연고지가 아닌 이곳에서 정을 붙이려다 상처를 받기도 했다. 상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가긴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와서 상처에 대해 길게 늘어놓고 싶은 마음도, 에너지도 없다. 지금은 어쩌면 내 옹졸한, 간장 종지만 한 마음 때문이라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 한 번 올려보는 정도다. 그렇게 지나고 보니 울고불고했던 것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서툴렀고, 상대방도 서툴렀으니 상처를 주고받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다정해진다는 것은
김혼비의 <다정소감>에는 작가의 신입 시절 일화가 등장한다. 첫 비행, 그것도 새벽 비행을 앞두고 있던 작가는 늦잠을 자버리고 만다. 그러나 동기들이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비몽사몽한 상태로 작가의 집에 왔다고 했다. 화장과 머리, 옷까지 세팅해주는 그들을 보며 작가는 ‘연대’의 감각을 느꼈다.
‘망했다는 생각에 손마저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같은 것. 그 손들이 누군가를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 등 뒤로 따뜻한 눈빛들을 가득 품고 살짝 펴보는 어깨 같은 것. 누군가 박살날까 봐 걱정될 때 가만있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에서 한 번쯤 느껴본 감각일 거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일하는 거처럼 보여도 다 뚫려있는 파티션 사이로 누가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채는 긴장감의 연속에서 나를 향해 뻗어준 (친구보다 멀지만, 타인보다 가까운) 직장 동료의 손길은 따뜻하고 다정하다. 어떨 땐 괴로운 출근길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을 마주쳤을 때 ‘화이팅’을 외쳐주기도 하고, 어떨 땐 바쁜 상대방을 위해 미리 보고서 작성을 도와주거나, 출장 중 필요한 서류나 자료를 보내주기도 한다. 또는 무더운 날에 아이스크림을 쏘는 차장님도 있다. 이처럼 삭막한 사회생활에서도 다정의 순간은 언제나 존재한다.
시시각각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그래서 관계도 달라진다. 이렇게 간단한 논리를 나는 직장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체득했다. 가변적인 관계 속에서도 나는 김혼비 작가의 ‘연대감’과 더불어 어떤 관계에도 내 안의 따뜻함을 잃지 않는 것, 그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직장생활에서의 다정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서 업무를 함께 하며 자료를 만들고 하나씩 헤쳐 나갈 때, 그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면 따뜻한 마음씨는 저절로 생기곤 했다. 그러니 이 다정함은 모두가 갖고 있는, 어쩌면 완전히 발현되지 않은 원석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정함으로 살아보기
어느 심리학책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야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아무래도 처음 친해질 땐 일상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보니 그런가 보다. 그러나 남의 일에 관심 많은 사람들과 폐쇄적인 공간에서 함께 있다 보면 사적인 이야기가 때론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일터에서는 예전만큼 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앞서 봤던 미정이의 해방일지처럼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온 마음을 열어 좋아했던 적이 있었나 의구심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관계’라는 다리 어딘가에는 금가고, 깨지고 아슬아슬하다라는 느낌이 늘 있다. 예컨대 공부를 잘하면 질투하게 됐고, 또 언젠가 나를 떠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내가 먼저 상처를 내기도 했다. 결국 이런 과정에서 ‘인생은 혼자야’로 결론을 내버리고 마니, 직장생활에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한 건 아닐지, 그래서 점차 인간관계에 지쳐가는 건 아닌지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아무리 ‘사람이 싫어요, 피곤해요’ 해도 사람 곁을 떠나서 나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그 후로 사람과 연을 딱 끊어 교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느 모임에 있든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완벽하진 않지만, 어떤 사람이 나와 맞는지 구별할 수 있는 내 사회적 경험이 존재한다. 상대방과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만약 믿을만한 사람이고, 마음을 터놓고 지내고 싶은 상대라면 그저 좋아하기만 해도 바쁘다.
‘결국은 소중한 사람의 손을 찾아 그 손을 꼭 잡고 있기 위해서, 오직 그러기 위해서 우린 이 싱겁게 흘러가는 시간을 그럭저럭 살고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p.139
흔히들 가장 다정한 사람들은 가장 분명한 경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무례한 사람에겐 분명하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다정해지며 동료애도, 인류애도 서로 잃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나와 상대방의 적당한 거리도 찾고, 외로움에 지쳐 눈물 흘리는 일도 없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상처받고 거부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좋아하기로 했다. 물론 거절당하면 여전히 마음이 따끔하다. 그래도 상처받으면 받으라지 뭐. 한 번 어렵게 내 안에 둥지를 튼 이 다정함은 겨울날 꺼지지 않는 모닥불처럼 훈훈함을 지켜내고 싶다. 그래서 그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이 다정함의 힘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손을 꼭 잡고 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