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원서접수를 마치고2
나는 00사 사이트를 맹신하지 않기로 했다.
00사 사이트를 매일 매일 들여다 보며 아이의 수시 원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던 나의 모습과는 다른,
이율배반적인 말이라는걸 잘 알고 있다.
00사 사이트에서 지원 가능한 대학과 학과를 수시저장소라는 항목 안에 넣어두고 수시로 드나들면서 적정과 소신의 여부를 가늠해보았다. 사이트에서는 과거의 입결과 현재 지원 예정인 학생들의 내신 점수와 학생부 점수를 바탕으로 지원 가능 여부를 판단해주고 있었다. 교과전형으로 지원하는 대학이야 그렇다치더라고, 학종으로 지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대해 00사에서는 아이의 생활기록부를 AI로 평가한뒤 해당 대학별로 학종 점수를 내주었다. 사이트에서는 아이의 생활기록부를 비교적 상세하게 분석해 주고 있었는데, 물론 그 점수는 동일한 내신 점수대에 비해 좋지 않았다. 반장이나 학생회의 경험이 없으니 리더쉽이나 공동체 영역의 점수가 낮게 배정되었다. 생기부의 내용은 컴퓨터공학이나 코딩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아이가 기계공학이나 전자공학을 지원하면 점수가 그리 높지 않게 책정되곤했다. 수천 수만명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라고 하지만, 종합 전형에서는 생활기록부 말고도 수능최저나 면접 등의 조건들도 중요했기에 진학사의 의견을 곧이 곧대로 따를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 대치동의 컨설팅 결과와 00사 사이트에서 수시로 바뀌는 지원 가능성 여부의 상태를 머리 속에 넣어 두고 끊임없이 체크하고 있었다. 00사의 수시저장소에 넣어둔 대학의 가능성 여부는 적정에서 소신으로 어쩔때는 위험으로까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9월 10일은 서울대, 고려대, 카이스트의 원서 접수 마감날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도 소화가 되지 않아 이날의 일들이 더부룩하게만 느껴지지 때문이다. 입시의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왈가왈부 떠들어대는게 옳은 일인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학의 실명과 지원한 학과를 드러내는것은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진정성 하고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저 알파벳 대문자롤 표기하기로 하자.
아이는 고려대와 학교장추천전형에 지원했다.
전년에 비해 낮은 경쟁률을 보고 서울대도 막판에 고민했지만, 서울대를 쓰기 위해서는 한장의 수시 카드를 버려야했다. 이미 다른 한장의 학교장추천전형 카드를 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준비도 되지 않은 일반전형의 면접을 바라보고 우주상향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고려대 학교장추천전형에 기대하는바가 컸다. 아이의 내신 점수가 고려대식으로 환산되었을때 나쁘지 않았다. 욕심이 났다. 아이의 적성하고는 상관없는 낮공(낮은점수의 공대라는 뜻)이라도 우선 보내고 싶었다. 마침 낮공 학과 하나가 00사에서 적정으로 떴다. 컨설팅 이후 전화를 걸어온 대치동 컨설턴트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격려했다. 그런데 마감 전 3시에 발표된 경쟁률에서 아이가 평소 지원하고 싶은 학과의 경쟁률이 매우 낮았다.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어떻하지? 저 학과들은 00사 사이트에서 우리 아이가 지원하기에는 소신이나 위험으로 뜨는데...그런데 아이에게 적정으로 뜨는 낮공 학과의 경쟁률이 오히려 높았다. 아....어떻하지?
어떻하지? 손바닥에서 마구 땀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지르지 못했다. 진학사에서 적정권으로 떴던 아이의 적성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낮공 학과에 지원했다.
7시 고려대의 경쟁률 발표가 있었다. 낮공의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아이가 지원하고픈 학과의 경쟁률은 5:1이 미처 안됐다. 수시에서 총 6장을 쓰는걸 감안하면 사실상의 미달이었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엉엉 울었다.
어차피 알게될 사실이기는 했지만, 아이에게도 미처 말하지 못했다.
가슴이 너무 쓰라렸다.
아이가 지원하고픈 컴공이나 인공지능학과는 00사에서 소신으로 떴다. 그래봤자 70%컷 하고의 차이는 0.1~.02 차이에 불과했다. 나는 그 차이를 무시하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사고하고 행동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입맛이 쓰고, 가슴이 미어지는건 어쩔수가 없다.
다음날은 연세대의 마감날이었다.
이날부터 나는 전날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00사를 내다버렸다.
대신 내손에는 각 대학별 2년치의 50%컷, 70%컷이 정리되어있는 프린트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또하나
노트북 화면에서 얼굴을 들어 아이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이 학교...기계공학이 적정일것 같은데...기계공학도 아주 안정권은 아니야'
'엄마~ 나 기계공학보다는 소프트웨어 하고 싶어'
'그래..그러자...점수가 약간 부족한것 같지만, 차이가 그리 크지 않으니 한번 넣어보자'
분당과 대치동의 컨설팅, 담임하고의 상담, 진학사의 유료 서비스를 통해 돈과 시간과 노력을 갖다바치면서도
내가 진작 놓치고 있었던것...
아이와 대학과 학과, 전형에 대해 깊게 깊게 대화하는것....
00사의 세계에서 소신은 나쁜것이다.
당신이 지원은 할수 있지만, 합격을 보장할 수 없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만 왜 소신이 나쁜것인가?
00사에서 알려주는 적정 루트를 따라가다 고려대 원서접수를 망해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 한개의 대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소신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마음이 더 가볍다.
왜...아이가 원하는 곳에 지원했으니까.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00사 점공 순위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점공이 뭐나고?
실제 지원한 대학을 입력하면 내 생기부를 바탕으로 순위를 알려주고, 합격여부를 예측해주는 시스템이다.
이미 지원한 대학의 합격여부를 예측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수능 최저를 맞추기 위해 한자라도 공부를 더하는게 낫지 않은가?
내가 너무 초짜 학부모라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00사의 예측 시스템이 정시에서는 거의 100%라고 하던데,
어쩌면 00사의 예측 시스템은 단순한 합격 여부의 예측을 넘어, 오히려 실제 경쟁률과 원서를 접수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올해 황금돼지띠들은 눈에 띄게 하향지원을 했다. 모두 유튜브에서 난리치는 입시 컨설턴트들의 입김때문이었다.
여기는 나처럼 순진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입시 공화국이다.
그리고 00사와 입시 컨설턴트들에게 놀아나는 그들을 보라.
레밍떼처럼 불쌍하지 않은가...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