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첫 서울살이와 룸메이트

철없던 남매의 자취방

by 성냥

얼마전 또 이사를 가고싶다는 내 말을 듣던 엄마가 "너처럼 이사 많이 다닌 애 또 없을 거야. 글로 한번 써봐라."라고 하셔서, 정말 글로 쓰게 되었다. 이사 횟수를 꼽아보니, 나이를 한살 먹을 때마다 집이 매번 바뀐 꼴이었다. 집순이인 나는 안주하지 못하는 성격을 다른 곳에서는 크게 이루지 못하고, 내가 사는 공간의 환경을 새롭게 바꾸는 것에서 만족을 찾았나 보다. 나의 집에 대한 로망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래서 주거유목민인 나의 집에 대한 글을 한번 적어보려한다.



열아홉에 대학에 입학했고,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마침 친오빠가 이미 옆 대학교의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서는 우리 둘을 한 곳에 모아놓을 요량으로, 학교 근처의 아파트 전세를 얻어주셨다. 덕분에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고향에 있을 때처럼 아파트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예민한 데다 조금만 신경에 거슬리면 편두통이 도지는 걸 알고 있었던 부모님의 배려였던 것 같다.


그렇게 포장이사를 불러 살림살이들을 첫 보금자리로 옮겨놓고 나의 서울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학교가 바로 코앞이었기 때문에, 통학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초반엔 모든 게 새로웠고,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유일한 룸메이트가 오빠인 점만 빼고는 큰 변화없이 모든 게 물흐르듯 흘러갔다.


그러던 것도 잠시, 얼마 가지 않아 오빠와 나는 그런 감지덕지한 상황에서도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던 고향집에서와 달리, 오빠와 나는 룸메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서로 미루기 바빴다. 나는 화장실이 딸린 안방을 사용했고, 오빠는 작은방 두 개를 침실과 공부방으로 사용했는데, 왔다 갔다 하는 오빠와 마주치기 싫어서 말도 안 하고 방에만 콕 박혀있었던 적도 있다. 어린 마음에 서울에 처음 온 나를 챙겨주기는 커녕 밥 한 끼 사준 적 없는 오빠가 미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도 고작 스물한 살 방황하는 청춘일 뿐이었다. 하긴, 둘 다 집에서 오냐오냐 공부만 하면 되는 환경 속에서 자랐으니, 철이 없을 만하다. 다 키웠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보낸 우리를 보는 부모님 심정은 오죽했을지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아빠는 편지에 규칙까지 첨부해서 보내기까지 하셨다.


두 살 터울이자 한 학년 차이인 오빠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바로 대학에 가버렸으니, 그러는 사이 난 오빠와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둘만 살게 되었지만, 아직 둘의 관계는 유년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파트에 덩그러니 둘만 남게 되자 서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에서 싸울 땐 언제나 엄마가 옆에 있었고, 말리는 엄마를 믿고서 신나게 싸웠는데, 서울 하늘에 둘만 남겨지게 되자,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없이 그렇게 사소한 일로도 크게 다투게 되었다. 결국 내가 울음을 터트리고 상황 마무리가 되었는데, 그때 오빠가 사과의 의미(?)로 날 잡고 딱 한번 놀이공원에 데려가 준 게 기억이 난다. 어떤 일로 싸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그때 함께 놀이공원에서 신나게 탔던 바이킹과 롤러코스터만 생생하다.


어찌어찌 1년간 오빠와 둘이 지내다가 결국 오빠가 먼저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토록 바랐던 혼자 독차지한 집이었지만, 적막한 아파트가 오히려 외롭게 느껴져서 엄마 밥이 그리운 마음에 고향집에 자주 들락날락거리며 대학교 초반을 보냈다. 내가 처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더라면 그 시기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덕분에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집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성향이 맞는 룸메이트가 자취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은 오빠와 같이 생활하지 않아서 사이가 참 좋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자취 라이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부유했던 시절이었다.



첫번째 집과 추억의 놀이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