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때로는 고장 나는 게 좋은 겁니다

일단 고장이 나야 개선할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by 안치형

물건을 사면 고장 나지 않고 오래 사용하기를 바라죠. 특히 아끼는 물건이거나, 내 몸 이라면 더욱 그럴 테고요. 하지만 고장 나는 것을 꼭 안 좋게만 볼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고장난 안방 손잡이를 고치다

몇 달 전부터 안방 손잡이가 문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문 안팎으로 1cm 정도 되는 공간이 생겨 버렸습니다. 기능상 문제는 없었지만 보기가 흉해서 고쳐보기로 했습니다. 분명 어디엔가 볼트가 있을 텐데 왜 안 보이는 걸까. ‘모르겠다 일단 뜯어보고 망가지면 열쇠 집 불러야겠다.’ 드라이버로 이곳 저곳을 건드려보니 대충 감이 왔습니다.




“엇차!” 철그렁 소리와 함께 손잡이 덮개가 분리되었고 그 안에 위, 아래 두 개의 볼트가 보였습니다. 드라이버로 볼트를 조이고 다시 덮개를 끼워 넣으니 감쪽같이 수리가 되었습니다. 급상승한 자신감. 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든 손잡이를 한 번씩 손봤습니다. 안방 손잡이가 멀쩡했다면 아마 지금도 손잡이 고치는 법을 몰랐을 겁니다.



사유하는 인간을 우울 행성에서 구출하라


제 주위에는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덕분에 대화가 즐겁습니다. 가십거리에는 별로 관심들이 없고 최근에 사유한 것들을 나누기 때문에 대화에 깊이가 있고, 농도도 짙습니다. 반면 생각들이 깊어서인지 가끔 짙은 회색빛의 우울 행성을 헤매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바로 초록별 지구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방법이 문제인데, 처음에는 대처방법을 몰랐습니다. 침소봉대의 끝판왕인 이들에게 아무리 객관적인 설명을 해줘 봤자 귓등으로도 듣질 않았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파국이 시작되었으니까 말이죠. 정말로 우연히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어느 순간 그들 스스로 헤쳐 나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제가 한 거라고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들어준 것뿐인데 말이죠.


부정적인 생각에 집중을 못 하도록 화제를 돌리는 게 비결일까? 매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꽤 효과적이었습니다. 건강한 정신상태를 정상이라 본다면 우울함은 마음에 고장이 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손잡이를 고친 경험처럼, 마음도 고장이 난 후에야 고치는 법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본인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 대처를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바닥을 치기 전에 ‘나 지금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다.’라고 자각하면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니까요. 이것만 해도 전보다 훨씬 나아진 겁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트레스를 깨닫다


저의 경우는 또 다릅니다. 저는 우울함을 거의 느끼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짧아서 일수도 있겠네요. 우울해지지 않는 건 좋은데, 덩달아 스트레스도 느끼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안 받는 체질이라 생각했습니다.

한 달 전. 치통이 하도 심해서 병원에 가야 하나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내가 일 좀 쉬엄쉬엄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스트레스 엄청나게 받고 있다면서 말이죠.


“무슨 소리야? 난 스트레스 같은 거 안 받는 체질인데?”

“뭐래, 요새 엄청 예민하거든. 애랑 나가서 좀 뛰던가 해.”


혹시나 해서 노트북을 덮고 아이랑 놀아줬습니다. 10분도 채 안 되어 턱에서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코와 미간을 거쳐 머리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치통이 사라졌습니다. 근 40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이렇게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후로 미간이나, 치아에 기가 모이는 느낌이 들면 바로 휴식을 취합니다.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산책하러 나가죠. 그러면 긴장이 풀립니다. 저만의 스트레스 대처법이 생긴 겁니다. 극심한 치통이 없었다면 여태 스트레스를 쌓아놓고 살았을 겁니다. 그러다 뇌졸중 같은 큰일이 날 수도 있는데 말이죠.



물건이든, 내 몸이든, 탈이 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고장 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완전함을 드러내 보이며 개선이 필요한 곳을 알려주니까요. 그런다고 완벽해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나아질 수는 있습니다. 손잡이도 고칠 줄 알고, 우울함과 스트레스도 극복할 수 있는, 더욱 진보한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거죠.


이것만 해도 훌륭한 것 아닌가요?







Who am I?

인생작가.

딱히 자랑할 게 없어서

살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씁니다.


"당신이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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