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빛 한낮의 기운이
오래된 연립 베란다를 통해 드리워진다.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방바닥에 엎드린다.
익숙한 듯 만화책을 펼치고 기름종이를 갖다 댄다.
[프린세스, 은비가 내리는 나라, 인어공주를 위하여, 안녕 미스터 블랙]
순정만화의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머리카락이 풍성하고 구불구불하게 길다.
폭포수가 흘러넘치듯 넘실대는 머릿결과 주름 가득한 치마들.
눈동자는 어찌나 영롱한지 윤슬을 보듯 반짝거린다.
연필로 한 선 한 선 따라 그리는 폼이 제법 진지하다.
국민학생 시절 나의 여가는 만화책과 함께였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코난]도 빠질 수 없다.
분명 다 아는 내용인데도 보고 또 본다.
시험이 끝나면 루틴처럼 만화방으로 달려간다.
순정만화 코너로 지체 없이 직행한다.
다음 호가 나온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없다. 이미 다 빌려갔다.
봤지만 또 볼 것들, 아직 안 본 것들을 두둑이 품에 안고 만화방을 나온다.
이 순간만큼은 개선장군이 아닐 수 없다.
방문을 닫고 만화책을 내려논다.
베개를 등에 대고 자세를 잡는다.
만화 속 그녀가 되어 가슴 시리다 설레다
어머 이건 그려야 되는 장면을 만나면
벌떡 일어나 서랍에서 기름종이를 꺼낸다.
세상 진지한 엉덩이로 엎드려 종이를 대고
서걱서걱 따라 그린다.
인물이 구불구불 살아난다.
선이 추가될 때마다 생명을 띄는
표정과 동작과 옷주름들.
나는 이들을 소생시키는
호흡이 된다, 생명수가 된다.
2박 3일 가족과 함께했던
캄파슬로우 숙소에 있던
꽃무늬 소파를 색칠하며
그때를 떠올린다.
잠시도 여유롭게
저 자리에 앉아보지 못했던 나는
색칠을 하며 이제야 앉아본다.
기름종이는 없지만
소파를 통해 비치는 내 유년을
가만히 대고 따라 그린다.
그때의 방바닥이 내겐
모닥불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나무집의 꽃무늬 소파였다.
즐거울 것 없던 내 유년에
포근함을 제공해 주던
사적인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