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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티마커 SALTYMARKER Nov 13. 2023

뇌과학에서 제시하는 삶의 방향

https://youtu.be/5WFIpB-Xkzs?si=Dbmu2p34NFw01zol


오늘 내가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꾸려나갈지’를 뇌과학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싶었는데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이야기는 엉뚱한 곳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강의를 마치고 아쉬운 마음을 이 글에 담아 보겠다.     


일단 그 이야기부터 먼저 해 보겠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의 생각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눈동자를 돌려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 볼 수 있지만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우리의 눈은 무의식 중에 움직이고 시선이 가는 대로 보고 있다. 눈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장 수의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손과 다리의 움직임도 한 번씩 의지대로 움직이는 걸 제외하면 자동적인 반응에 의하여 움직인다.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때 다리의 움직임,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을 할 때 팔의 움직임, 피아노를 칠 때 손가락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의 동작에 대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게임 중에 캐릭터를 움직일 때 방향이나 특정 동작 정도만 컨트롤하는 것처럼 방향성 정도만 명령을 내리고 나머지는 자동적인 움직임에 의해 보완된다.   

  

우리가 가장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뇌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인지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뇌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생각들이 떠오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거나 내뱉지 않거나 뿐이다.     


일체유심조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모든 것(일체)은 오직(유) 마음(심)이 만드는(조) 것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객관적 그 상태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추측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감각 기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뇌에서 정보를 조합하고, 기존의 기억이나 감정을 덧붙여 해석한 결과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객관적 세상 그대로 볼 수 없고,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감각 기관, 생각, 감정, 기억, 운동 등에 의지해서 주관적으로 본다. 즉 그 말은 객관적 세상조차도 우리는 마음대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감각 기관에 의해 왜곡되고, 기억이나 감정에 의해 재해석되고, 무작위로 떠오르는 생각들 때문에 정확하게 보기가 어렵다는 말이 된다. 해골물은 그냥 해골물이지만 원효대사가 자다가 마신 물은 원효대사의 자다가 깨어난 의식, 손끝의 감각, 혀가 느낀 물의 감각, 그 물을 맛있다고 해석한 뇌의 감정과 생각 등 복잡한 과정에 의해 해골물이 아니라 맛있는 바가지의 물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의 모든 사물도 그 정도가 다를 뿐이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고, 객관적 세상이라는 개념은 이상 세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생들의 성적이 나왔다. 60점부터 100점까지 다양한 성적 분포를 이루었다. 만약 똑같이 90점을 맞은 학생이 두 명이 있다고 하자. 그 두 명에게 있어 90점이 같을 수 있을까?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90점이라도 한 사람은 그 성적에 만족을 못 할 수 있고, 한 사람은 만족을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완벽주의적인 성격이고 틀리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90점이라는 점수는 그 사람에게 스트레스 상황인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은 원래 80점을 맞다가 이번에 90점을 맞았기 때문에 이전보다 잘 나왔다면서 기분이 좋을 수 있는 것이다. 60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60점이라도 공부한 것에 비해 잘 나왔네 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도 있고, 어떤 학생은 그 성적 때문에 평락이 나올까 봐 노심초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러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하였다. 같은 성적이라도 이렇게 마음에 따라 다르고, 그 마음이라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100점을 맞은들 만족이 안 되면 100점이 아닌 것이고, 내가 70점을 맞은들 만족스럽다면 90점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뇌가 사물을 절대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 달 동안 단 음식을 전혀 먹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 건빵 한 조각과 단 음식을 매일 먹는 사람에게 시럽을 듬뿍 넣은 바닐라 라테와 비슷한 말이다. 단 음식을 계속 먹지 않으면 뇌는 그것에 적응이 되기 때문에 단 음식에 대한 역치가 떨어진다. 그 상태에서 건빵 한 조각을 먹으면 그전에는 전혀 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건빵이 엄청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럽을 듬뿍 넣은 바닐라 라테는 건빵보다 매우 단 음식에 틀림없지만 뇌가 이미 단 음식에 적응이 되어 있다면 시럽을 듬뿍 넣었음에도 뇌는 그 차이를 잘 모른다.     


도파민에 노출된 뇌도 마찬가지다. 만약 어릴 때 크게 성공해서 강렬한 도파민의 분비를 느낀 사람은 인기가 없어지면 도파민 분비가 떨어지면서 뇌가 그 갭을 견디지 못한다. 분명히 인기를 얻기 전에는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었는데, 폭발적인 도파민에 노출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평범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고 도파민을 분비시킬 다른 것들을 찾게 된다. 술이나 담배로 도파민을 분비시켜 보다가 결국 만족이 되지 않으면 마약에 손을 대게 되는 것이다. 크게 성공했을 때 느꼈던 쾌감은 마약 외에는 만족을 시킬 수 없고, 마약을 할 때는 순간 만족감이 들지만 그 농도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후에는 감정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약의 위험성이 아니라 인간의 뇌는 감각이나 생각을 절대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건빵과 시럽을 듬뿍 넣은 바닐라 라테는 당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지만 어떤 맛에 적응되어 있냐에 따라 오히려 건빵을 더 달게 느낄 수도 있고, 성공을 하기 전에는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꼈는데 성공의 쾌감을 맛본 뒤에는 더 큰 성공이 아니면 행복을 못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뇌의 성격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꾸려나가야 하는지 방향을 찾을 수 있다. 100점을 받는다고 다 행복한 것이 아니고, 시럽을 듬뿍 넣은 바닐라 라테가 반드시 건빵보다 달콤한 것은 아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점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느끼는 나의 기준에 있고, 절대적인 당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맛에 물들지 않은 나의 혀에 있다. 성공을 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성공을 한 만큼 더 큰 성공을 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구조이고, 세상은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세상은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의 뇌가 느끼는 역치를 바꿔야 한다. 술로 행복 수치를 올리고 싶어도 매일 소주를 한두 병씩 마시면 술에 의한 행복감이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잔의 행복을 위해 7일 중 5일은 술 없이 쉴 필요가 있다. 단맛에 행복감을 느끼고 싶다면 설탕을 더 많이 넣을 것이 아니라 달지 않은 음식을 먹어서 단맛에 대한 역치를 낮춰야 한다. 100점에 대한 행복감은 계속 이어질 수가 없다. 110점, 120점을 맞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70점을 맞더라도 80점을 맞더라도 100점에 기준을 둘 것이 아니라 내 길을 찾는 것에 기준을 두고 점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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