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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티마커 SALTYMARKER Oct 11. 2022

이별의 끝판왕

이별이란 원래 나에게 없었던 상태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에 슬퍼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없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별이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았다. ‘서로 갈리어 떨어짐’이라고 사전에서는 정의하고 있었다. 내 옆에 있던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 이별을 간단하게 생각하면 ‘있던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친한 친구가 옆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거나,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졌을 때, 혹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죽어 다시는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이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친구나 연인은 원래 나에게 있던 것이 아니다. 원래는 내 곁에 없었는데 살다 보니 생긴 것이고 그것이 없어지게 된, 다시 말하면 이별이란 원래 나에게 없었던 상태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에 슬퍼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없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있었으니 상실감이 클 수는 있겠지만, 그 외의 사람들과 이별할 때에는 ‘아, 그 사람이 없던 상태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구나.’ 하며 가볍게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가정을 하여) 이런 논리를 연장해 보면 이별의 끝판왕은 누구일까. 아무리 사랑했던 연인이라도 그 사람이 없었을 때 잘 살고 있었던 나를 돌이켜보면 죽을 일은 아닌 것이 되고, 몇십 년 친하게 지냈던 친구라도 그 친구를 만나기 전에 다른 친구들을 사귀며 살던 나를 돌아보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일이 된다. 부모처럼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사람과의 이별은 감당하기 힘들 수 있겠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그냥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뿐인 것이다. 그러면 누구와의 이별이 가장 어려운 것일까?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재하였고 나와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 혹은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람 중에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 원래 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래서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별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우는 과연 어떤 경우일까?


    바로 '나 자신과의 이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존재했고, 인생을 통틀어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보고 듣기 시작한 때부터 항상 있었고, 내가 없었던 때를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별의 감정도 쉽게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나 자신과의 헤어짐이야말로 이별의 끝판왕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이별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 이별 후 지속될 그리움, 더 잘해 주지 못했다는 미안함, 아쉬움, 단절감, 씁쓸함, 두려움, 외로움, 후련함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왔는지, 얼마나 깊이 닿아 있었는지에 따라 감정의 강도가 다르고 비율이 다르다. 하지만 이별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될 때에는 타인과의 이별과는 다른 면이 있다.


    첫째,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하고, 연습을 할 수도 없고, 상상도 잘 되지 않는 이별이다. 겪어 보았다는 것은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습이 불가능하고, 나 자신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즉, 내가 없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도 잘 되지 않는다.


    둘째, 타인과의 이별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 있을 수 있지만 나와의 이별은 그 자체가 세상의 무너짐이다. 나와 이별하는 순간은 모든 세상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것 같은’이라는 사이비 같은 수식어가 필요 없다. 나의 전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 죽을 ‘것 같은’ 아픔 등은 이별의 고통을 흉내만 낸 것일 뿐 진짜가 아니고, 오로지 나와의 이별에만 수식어 없는 진짜배기를 적을 수 있다.


    셋째, 이별 이후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물론 갑작스러운 죽음 외에는 죽는 것에 대해 상상을 할 수 있고, 상상에 기반하여 어렴풋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제 죽는구나 하며 두려움, 슬픔, 덧없음, 그리움, 후회, 주변 사람에 대한 애정이나 안타까움, 우울함, 미안함 등의 감정으로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이별하기 전일 뿐이다. 대부분 이별이 힘든 것은 이별하기 전의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이별 이후의 감정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의 이별 후에는 어떤 방법으로 죽었든지 상관없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별 후에 힘들 일이 없다. 헤어지지 말 걸 하는 후회의 감정도 없을 것이고, 이별하여 너무 슬프다 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상실감으로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


    마지막으로 나와의 이별은 마지막 이별이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무뎌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힘든 이별은 나이와 상관없이 힘들다.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어야 이별의 고통이 아무렇지 않을까. 이별로 힘들었던 사람들은 이별이 지긋지긋할 것이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살면서 만남을 가지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살면 반드시 수없는 이별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이별을 한 뒤에는 더 이상 이별을 하는 일이 없다. 이별의 고통에서 드디어 해방이 된다는 이야기다. 부모나 자식과의 이별을 하는 일도 더 이상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도 더는 없다. 이별의 끝판왕은 곧 마지막 이별이 된다.


    잠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말이 있다. 잠에 깊이 빠져들면 생각이 없어지고, 나의 몸을 느끼지도 못하고,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잊게 된다. 낮에 활동하고 밤이 되어 잠에 드는 것은 마치 젊을 때 열심히 살다가 나이가 들어 죽는 것과 비슷하다. 이별도 마찬가지다. 자라면서 친구와 이별하고, 연인과 이별하고, 부모나 가족과 이별하고, 배우자와 이별을 하고, 마지막으로 나와 이별을 하게 된다. 어쩌면 수많은 이별을 겪는 것은 나와 이별하기 위한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나와의 이별이 힘들지 않으려면 이별을 겪으면서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수많은 이별을 겪는 것은 나와 이별하기 위한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만남은 좋지만 이별을 겪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은 내가 애착하는 대상일수록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언젠간 이별을 겪어야 하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언젠가 나 자신과도 이별을 해야 한다. ‘아, 없던 상태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구나.’ 하며 가볍게 떠나보내야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커버 사진 -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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