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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봄 Nov 12. 2018

질문이란 작고 초라한 바가지

내 질문이 비록 초라하고, 볼품없고, 깨지기 쉽다하더라도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_ 에밀리 디킨슨
물음표 바가지


질문이란 작고 초라한 바가지

이 세상 크고 깊은 지혜의 샘물에서

겨우 이 한 몸 갈증을 잠시 해소할

지식 쪼가리 몇개를 담아올 뿐이라네



질문이란 작고 볼품없는 바가지

그대 뜨거운 사랑의 바다에서

겨우 하루를 버틸 따뜻한 온기 한그릇

담아올 뿐이라네



내 작고 깨지기 쉬운 바가지는

겨우 그정도 밖에 담지 못한다네


질문 바가지 (초고)


2018. 11. 12 질문술사

질문의 초라함을 다시 묻다

시족(詩足) 초고 _ 나는 끄적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시족(詩足) 1 :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밤이 되어 홀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되면, 숙명처럼 나는 나의 초라함을 마주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순간은, 그저 타인의 빛을 잠시 빌려와서 빛나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밤이되면 마주하는 외로움과 어둠 속에서 나의 그림자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고통 속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고 삶을 긍정하라던 니체를 읽거나, 그림자를 창조의 원천으로 승화시킨 괴테의 글에 손이 간다. 당장 답할 수 없는 질문에는 그저 머물러도 좋다던 릴케가 생각나서, 어제 밤에는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이라고 노래한 릴케의 글을 끄적이며 옮겨 적었다.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_ 릴케
시족(詩足) 2 :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지

 내 주위엔 늘 빛나는 벗들이 있고, 가끔 그 벗들이 친절하게 손을 내밀어준다. 젊은 시절 릴케의 시에 기대어 어두운 터널 속을 버텼다는 윤정은 작가가 릴케의 글을 올린 내 페이스북에 댓글을 남겼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도 한 번 읽어보라 권했다.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라는 시집을 구입해 디킨슨의 시를 마주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지'라는 문장에서 숨이 턱 막혔다.


시족(詩足) 3 : 질문술사는 질문하는 바가지

 이 답답함을 풀어내고 싶어 '질문 바가지'를 주제로 시 한편을 끄적였다. 몇년 전에 익숙한 질문 하나를 다시 받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비유적으로, 상징적으로 정체성을 표현해보신다면?'이라는 질문에 떠올랐던 심볼이 '바가지'다. 목마른 이들이 갈증을 해결하려고 할 때, 물을 줄 수는 없겠지만, 바가지라도 되어 목을 축이는 일을 돕고 싶었다. 비록 작고 초라한 바가지로 살아가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쓰임이 있다니 아직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
6년 전 오늘, 페이스북에 끄적인 내 존재 가치에 대한 부끄런 끄적임
시족(詩足) 4 : 내 존재가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페이스북의 알림을 통해 6년 전에 올린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다행히 지금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가치있다'고 오만하게 주장하지 못한다. 오직 만남을 통해 가치있는 것들을 벗들과 주고 받으며 나눌 때만 내 삶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의존성에 중독되어 있다.

  리더들에게 어른다움을 일깨우는 질문을 선물하는 사람, 질문을 통해 우리의 성장을 조력하는 사람, 함께 품을 가치있는 질문을 찾고 디자인해서, 함께 머물며 탐구할 공간을 구축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질문디자인연구소를 만들었다.
시족(詩足) 4 : 나는 끄적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생각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끄적거려두면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 스스로를 부족하고 볼품없다 여기는 나와 같은 벗들에게, 어른과 어른됨에 목마른 친구들에게 잠깐이라도 공헌할 수 있음에 고맙고 감사하다. 내 질문들도, 내 시시한 시들도 누군가에겐 쓸모가 있을 터이니, 계속 끄적거릴 동기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시족(詩足) 5 :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꽃자리니라.

 아침에 진성 리더십으로 리더들에게 북극성을 잊지 말라고 깨우쳐주시는 윤정구 교수님의 페이스북을 기웃거렸다. 내겐 또 다른 빛나는 어른이다. 오늘 올려주신 글을 '수주작처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에 관한 글이였다.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

  이 문장에서 나는 구상의 시가 떠올랐다. 그래 바로 이 자리가 꽃자리다. 내가 앉은 이 자리에서 '질문으로 꽃을 피우고', '시시하더라도 시인처럼, 예술가처럼'아름다움을 표현하며 살아가려 한다.


2018. 11. 12. 질문술사
내 본질을 다시, 묻다
여러분이 앉은 자리가 어디든 질문으로 꽃피는 자리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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